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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도사님 말씀

가야와 임나의 진실을 밝힌다(2)_2

by 알라뷰 소녀시대 2022.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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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기원, 삼시랑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연 주축들은 모두 젊은 사무라이들이다. 사무라이는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절, 신라 화랑도의 정신을 융합하여 계승했다. 그 근원은 신시배달의 삼(시)랑문화이다. 삼랑은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한민족 고유의 신교 종교 집단이자 앨리트 무사도武士道 집단이었다.

護守三神(호수삼신)하야 以理人命者(이리인명자)를 爲三侍郞(위삼시랑)이니
本三神侍從之郞(본삼신시종지랑)이오
三郞(삼랑)은 本倍達臣(본배달신)이니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역세습삼신호수지관야)니라.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 『 환단고기』 「신시본기」)

일본에 삼랑문화를 전한 최초의 사무라이는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아메노 히보코)이다. 또한 천일창은 웅신단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옴으로써 일본 신사문화의 뿌리이기도 하다.

사무라이는 한자로 모실 시侍 자, 또는 선비 사士 자를 쓴다. 일본 봉건 시대의 무사 계급을 말한다. 원래는 유력 귀족이나 여러 다이후大夫를 섬기는 통상 위계 6위 정도의 하급 기능직 관인층이다. 일본에서 사무라이 문화가 대두된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鎌倉막부幕府를 세우면서이다. 요리토모는 세 아들을 사무라이로 키웠다.

사무라이는 세 가지 특권을 가졌다.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 타이토帶刀, 묘지名字가 그것이다.

‘묘지’는 성姓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이고, ‘ 기리스테고멘’은 평민이 사무라이에게 누를 범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목을 벨수 있는 특권이며, ‘타이토’는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이다. 여기서 기시스테고멘과 타이토는 고구려의 조의선인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일본 사무라이들만의 독특한 할복腹切り(はらきり) 문화는 나라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신라 화랑도 정신의 변형이다. 일본 사무라이문화의 결정판은 가모족鴨族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손자 이에미쓰의 손으로 완성되었다.



대마도의 명칭 변화
1855년~1877년에 발행한 영국 지도에는, 대마도를 ‘두 섬(Tsu Island)’으로 표기했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대마도를 ‘두 섬’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나중에 일본이 ‘두Tsu’라는 명칭은 그대로 인용하고 뒤에 섬Island 대신 시마sima(섬, 島)를 붙여서 ‘쓰시마Tsusima’라 한 것이다.

대마도는 삼가라三加羅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
1948년 8월 18일. 이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사흘째로 이승만 대통령의 첫 기자회견이 열렸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우리 영토인데 350년 전 일본이 탈취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 기자회견은 이듬해에도 계속됐다.

왜 이승만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에서 ‘대마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였으며 또한 대마도 반환을 언급한 것인가?

우리가 모르는 역사의 비밀을 이승만 대통령과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이 다스렸던 대마도#
1) 대마도 명칭의 유래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 제주도의 약 3분의 1 크기에 3만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있다. 부산에서 약 50km, 일본 규슈에서는 약 82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마도對馬島는 이름의 유래를 보더라도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대마는 바다 건너 조선의 마한과 마주 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되어 있어, 우리 선조들이 ‘두 섬’으로 부르던 것을 후에 ‘섬’을 뜻하는 일본어 ‘시마’를 붙여 ‘두시마’, 즉 ‘쓰시마’로 불리게 되었다. 어원과 명칭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2) 한국의 지배를 받은 대마도의 역사
대마도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전수되는 첫 번째 관문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배를 위해서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던 소통로인 대마도를 가만두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역사학자 다보하시 기요시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으로 활동하던 1923년 7월 동경제대 출신 구로이타 가쓰미와 함께 대마도로 건너가 한국 관련 문서 6만 6,469매, 고기록류 3,576권, 고지도 36매, 고서 18점, 그림 53점 등을 은폐하거나 태워 버렸다고 한다. (출처: 하라다 사이에쿠, 『역사와 현대』)

그럼에도 대마도의 역사를 밝히는 기록은 여러 사서에 남아 있다.

❶ 고려 시대의 대마도
『고려사』에는 대마도 도주가 고려의 무관 벼슬인 ‘만호’관직을 갖고 있었다는 것 역시 고려가 대마도를 실제로 다스렸다는 것을 말해 준다.

❷ 조선 시대의 대마도
조선 『세종실록』에 “대마라는 섬은 본시 계림(신라)에 속한 우리나라 땅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더욱이 1750년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대마도가 부산 동래의 행정구역임을 밝히고 있으며, ‘백두산은 머리이고 대관령은 척추이며 영남 지방의 대마도와 호남 지방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고 함으로써, 제주도와 함께 조선의 기운이 흐르는 우리 영토로 지정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와 19세기 이후 외국인이 그린 여러 지도에서도 대마도를 일본의 영토가 아닌 한국의 영토로 분명히 그려 놓고 있다.

❸ 사국 시대의 대마도
대마도가 한국의 역사 강역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마도에는 단군조선으로부터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문화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상대마上對馬의 가미쓰시마 안의 히타카츠와 도요에서는 가야식 고분과 김해 지방에서 사용되던 토기가 발굴되었다. 미네에서는 세형동검과 환두대도가 발굴되었는데, 특히 환두대도는 대마도와 가야의 연관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표지 유물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대마도를 다스렸다는 놀라운 역사 진실을 밝히고 있다. 대마도가 곧 임나이며, 삼국이 나누어 다스렸던 삼가라였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지답사를 해 보면 상대마 지역에‘좌호佐護’, 도요타마에는 인위仁位, 미쓰시마에는 계지鷄知라는 이름으로 삼가라의 지명이 도로표지판과 우체국명 등에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대마도는 일본 열도 개척의 첫 관문
대마도의 고대 역사 진실을 밝히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시원 역사에 얽힌 실타래를 푸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일본 역사문화의 원류와 10만 개 신사문화의 원형정신도 바로 대마도에 살아 있다.

대마도는 배달·단군조선 이후 도래인들이 넘어가일본 열도를 개척하기 위해 발판으로 삼은 전진기지이자 문화 전수의 첫 관문이었다

일본의 창세신화는 단군신화와 유사
일제강점기에 한국사를 연구했던 일본인 학자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는 ‘신라에서 일본에 건너온 아메노히보코天日槍 왕자가 가져온 곰신단(熊の神籬)이 고조선의 태양신을 모셔다 제사 지내는 하늘의 제사 종교의식’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일본 교토京都산업대 문화학부 교수는 “한국 단군檀君신화의 환웅桓雄과 가야의 수로왕, 일본 개국 신화에 등장하는 천손 니니기瓊瓊杵가 서로 유사한 요소를 갖고 있다.”며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가 한반도계^중국계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자나기^이자나미 부부신
남신인 이자나기와 여신인 이자나미가 천부교天浮橋 위에서 긴 창으로 바다를 휘휘 저어서 오노고로시마淤能碁呂島가 되었고 이 섬을 ‘국중지주國中之柱’로 삼고 담로도淡路島, 사국四國, 은기도隠岐島, 구주九州, 일기도壹岐島, 대마도對馬島, 좌도도佐渡島, 본주本州 등을 대팔주大八州로 삼았다. 이것이 일본열도 창조 신화이다. 여기서 창을 가지고 휘저음으로써 만들어진 섬이 바로 일기도이다. 또한 한반도에 속해 있었던 대마도를 천부교로 표현하였다. 이 신화는 아마테라스가 대마도를 발판으로 일본 최초의 섬인 오노고로시마 즉 일기도를 정복한 다음 일본열도를 차례차례 정복해 나간 것을 상징한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천부교天浮橋 위에 서서 함께 의논하여 “이 아래에 어찌 나라가 없겠는가?”라고 말하며 창을 아래로 휘저어 푸른 바다를 찾았다. 그 창날 끝에서 뚝뚝 떨어진 바닷물이 응고되어 하나의 섬이 되었다. 이를 일러 은어려도磤馭慮島(오노고로시마)라 한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그 섬에 내려가 부부가 되어 살면서 국토를 낳고자 하였다. 그래서 은어려도를 나라의 중심 기둥으로 삼아 이자나기(陽神)는 왼쪽으로 기둥을 돌고 이자나미(陰神)는 오른쪽으로 돌았다. 이 두 신이 기둥을 나누어 돌다가 건너편에서 서로 만났다. ( 『일본서기』 「신대上」)

대마도의 대표적 신사들
천도天道신앙의 두 신사, 천신다구두혼 신사·다구두혼 신사
1443년, 서장관으로 대마도와 일본을 다녀온 신숙주(1417~1475)가 세종의 왕명을 받아 편찬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에는 대마도에 살아 있는 소도문화 풍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의 남쪽과 북쪽에 높은 산이 있다. 두 곳 모두 천신산이라고 하는데 남쪽은 아들신 산(子神山)이고, 북쪽은 어머니신 산(母神山)이라고 한다. 그곳에서는 신을 숭상하여 집집마다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다. 산과 들의 초목과 짐승은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으며 죄인이 도망쳐 신당神堂 안으로 들어가면 또한 감히 쫓아가서 잡지 못하였다.”

대마도 전역에는 천신다구두혼 신사와 다구두혼 신사를 중심으로 단군조선의 소도蘇塗제천 성지聖地 문화가 민간에 퍼져 있는데 이것을 대마도에서는 천도天道신앙이라고 한다.

천신다구두혼 신사 외에도 많은 소도가 지금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람 키 높이의 돌무지탑을 이름하여 ‘액막이’라는 뜻의 ‘야쿠마의 탑(ヤクマの塔)’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천신다구두혼 신사에는 우리의 서낭당에서볼 수 있는 돌무지탑과 제단이 있다. 소도로 삼고 천제를 모셨던 신앙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천신다구두혼 신사에서 모시는 제신이다. 이곳은 바로 신사의 뒤쪽에 있는 세 봉우리의 산을 신체神體로 모시고 있다. 이 세 봉우리의 산을 천도산天道山 또는 천신산天神山으로 부른다. 우리가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신성시하여 삼신산三神山으로 모시듯이 대마도에서도 이 천도산을 삼신산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천신다구두혼 신사 근처에는 신황산영존神皇産靈尊을 모시는 두 신사가 있다. 먼저 사고강(좌호강) 건너 천신다구두혼 신사天神多久頭魂神社와 마주 대하고 있는 신어혼 신사神御魂神社가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20여 분을 차로 가면 주지노구두 신사舟志乃久頭神社가 있다. 작은 시골길 옆나무들에 둘러싸인 인적이 없는 조용한 이 신사도 신황산영존神皇産靈尊을 모시고 서낭당 돌무지탑의 영향을 받은 석탑이 양쪽으로 서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황산영존神皇産靈尊이 다구두혼신多久頭魂神의 어머니신(母神)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는 점이다.

천신다구두혼 신사와 관련된 설화에 따르면, 태양신의 기운을 받은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를 천동天童이라고 했다. 일본의 학자들은 천동天童신앙이 후대에 천도天道신앙으로 변한 걸로 보고 있다.

이즈하라는 대마도를 다스린 종씨의 본거지(万松院)이다. 이즈하라현에서는 해마다 7월 24일이면 어린아이들을 위한 축제인 지조봉地蔵盆 마츠리가 열린다. 이즈하라 시내 골목을 다니다 보면 지장보살 동자상을 모시거나 작은 돌을 모신 아기자기한 신사들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천동신앙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단군문화기행>의 저자인 박성수 교수도 ‘이곳 청수산에서 내려다보면 하치만궁이 있는데, 청수淸水는 약수, 곧 신수神水라는 뜻이므로 하치만궁도 본래는 천동天童, 곧 단군을 모신 천도 신사의 하나였다’고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대마도의 남쪽 츠츠 마을에 있는 다구두혼 신사多久頭魂神社는 아들신(子神) 천도산(龍良山)을 섬긴 신사라 본전이 없었는데, 신불습합神佛習合으로 불교가 유입되면서 현재와 같은 신사가 생겼다. 신사 뒤편에 서낭당의 당산나무 같은 큰 녹나무가 있는데 이는 원래 소도의 신단수에서 유래했다. 신사 부근의 소토산卒土山에는 팔정각八丁角이라는 성지가 있는데, 소토란 삼한의 소도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다구두혼 신사多久頭魂神社를 오르는 첫 번째 도리이를 지나면 고황산영존을 제신으로 모시는 고어혼 신사高御魂神社가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오카 마사오岡正雄(1898-1982)는 천신인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3종의 보기寶器’를 주어 신단수 아래로 내려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한 단군신화의 내용을 본뜬 것이 일본 신화이며 일본 황실‘신기神器 3종’의 발자취라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일본 창세신화 속 조화삼신인 고황산영존高皇産靈尊과 신황산영존神皇産靈尊은 각각 한민족 상고 역사의 주인공인 환웅천황과 황후인 웅녀이며 그 자녀인 다구두혼신多久頭魂神은 단군왕검으로 볼 수 있다.

동방 신교의 소도제천 문화가 북삼한과 남삼한에서 도래한 개척자들에 의해 일본 문화의 자궁인 대마도에 유입되었고, 또 일본열도에 전해졌다.

대마국의 제일궁 해신海神 신사 가이진 진자
북대마도의 서쪽, 한반도를 향해 서 있는 해신海神 신사! 이곳은 처음에 ‘해신의 아들’을 뜻하는 ‘와타즈미わたづみ 미코御子’ 신사로 불렸었다. 이후 하치만 신앙과 결합하여 하치만궁八幡宮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대마국對馬國 제일궁第一宮 신사가 되었다. 명치 3년에 와타즈미 신사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현재 한자 표기의 해신 신사로 바뀌었다.

인위항(니이仁位) 근처에 위치한 와타즈미(和多都美) 신사와 함께 일본 초대 왕 신무神武의 할머니인 도요타마히메, 즉 풍옥희豊玉姫命와 아버지인 우가야후키아에즈(鵜茅草葺不合)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다.

해신 신사는 일본 하치만八幡 신앙의 발상지로도 여겨진다. 하치만八幡신은 한반도에서 넘어간 대표적인 신으로 원래는 야하타八幡신이라 불렸다. 이 야하타신의 유래는 가라쿠니辛国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 가라쿠니는 일반적으로 가락국, 즉 가야를 의미한다.

해신 신사 앞 해안가에는 소도제천 문화의 상징인 서낭당 돌무지탑이 바다 건너 한반도를 향해 기도하듯 늘어서 있다. 신사 안에는 신라 시대의 동조여래입상과 고마이누 석상 등이 있어 예로부터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일본 역사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많은 신들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대륙과 한반도와의 관계를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 인물들을 신화 속의 신神으로 각색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후세들은 일본 창세역사 속 인물들을 신화로만 알게 되어 역사의 뿌리를 더욱 알기 어려워졌다.

일본 왕실의 본향 와타즈미和多都美신사
와타즈미 신사는 대마도의 중앙 인위仁位 지역에 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오가던 뱃길의 중간에 위치해 지정학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다. 더불어 와타즈미 신사는 일본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무대이자 고대 일본 신도神道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곳은 니니기의 아들인 히코호호데미노 미코토彦火火出見尊와 바다 신의 딸인 토요타마-히메 즉 풍옥희豊玉姫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다.

일본 건국신화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무왕의 할아버지 히코호호데미노 미코토彦火火出見尊는 잃어버린 화살을 찾기 위해 용궁을 방문했다가 바다 신의 딸인 도요타마히메豊玉姫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우가야 후키아에즈(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彦波瀲武鸕鷀草葺不合尊)이다. 나중에 이모인 다마요리히메玉依姫와 결혼하여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넷째가 협야狹野로서 훗날 일본을 건국한 초대 신무神武왕이다. 이상의 내용만 보더라도 와타즈미 신사는 일본 왕실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는 신무왕 부자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어 놀라움을 주고 있다. 제35대 사벌 단군 때 바다 위웅습熊襲을 평정한 장수 언파불합彦波不合과 제36대 매륵단군 때 삼도(왜 열도)를 평정한 협야후 배반명이 그들이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언파불합과 협야후 배반명이 부자 관계’로 나오고 있어 『환단고기』 기록의 정합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창세역사의 신비를 품은 와타즈미 신사는 그 이름에서도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모시는 제신 도요타마히메(풍옥희)는 해신의 딸이다. 신사 이름의 ‘와타(わた)’는 ‘바다(海)’를 뜻한다. 또 그들은 배를 모시고 있다. 와타즈미 신사의 도리이는 다섯 개인데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곳은 일본 내륙이 아니라 바다건너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 다섯 개의 도리이를 일직선으로 연결하면 닿는 곳! 바로 그곳에 거제도 가라산이 있다!

해발 585m의 가라산加羅山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어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였다. 그리고 태평양을 향해 있는 항구가 있다. 김해의 금관가야와 거제도에서 대마도를 오갈 때 표지가 됐던 가라산! 이것이 다섯 개의 도리이가 가리키는 비밀이다.

한편 규슈 서북쪽의 당진唐津시는 ‘가라쓰’로 불린다. 바로 ‘가야인들의 항구’라는 뜻이다. 동북쪽에 있는 이토시마糸島시에도 해발 365m의 가야산可也山이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거제도-대마도-북규슈의 가라쓰로 이어지는 바닷길은 해상왕국 가야인들이 개척하며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연결하던 가야의 해상 실크로드였다.

해상 소도蘇塗 오키노시마沖ノ島와 종상대사宗像大社
대마도와 일기도의 동쪽 망망대해에 홀로 있는 섬이 있다.

바로 삼신三神이 머무는 섬! 오키노시마沖ノ島! 지금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될 정도로 바다 위에 존재하는 신성불가침의 성역 오키노시마沖ノ島는 마치 해상 소도蘇塗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오키노시마는 가야의 해상 활동이 왕성하던 4세기 후반부터 9세기 헤이안 시대까지 5백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스물두 개의 제사 유적에서 십만여 점의 국보급 문화재가 출토되었다. 가야계 청동거울, 곡옥, 동검 등의 신기삼종神器三種을 비롯해 각종 철제 무기류 그리고 우주 원십자형 순금 반지와 신선문화를 상징하는 말 꾸미개 등 해상왕국 가야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이들 제사 유물은 규슈북부(무나카타시宗像市) 종상대사 신보관神宝館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다.

5백여 년간 행해졌던 해상 소도 오키노시마의 제천문화는 신사 배치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세 곳에 신사를 만들어 세 여신을 모시는 종상대사!

오키노시마沖島 충진궁沖津宮 ; 다고리히메田心姫神
오오시마大島 중진궁中津宮 ; 다키츠히메湍津姫神
무나카타시田島 변진궁辺津宮 ; 이치키시마히메市杵島姫神

이러한 삼신문화의 체계는 규슈의 우사하치만신궁宇佐神宮(다가와시田川市)과 히코산신궁英彦山神宮(무나카타시宗像市)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상에서 볼 때 신교의 삼신문화가 일본열도에서도 제일 먼저 규슈에서 활짝 꽃피웠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무나카타시 종상대사의 신성한 숲에는 ‘신이 강림한 땅’이 있는데 고궁제장高宮祭場이라 하여 사각형의 터에 신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히모로기神籬 제단의 원형이자 삼신문화의 으뜸이 되는 신상, 곧 ‘종상宗像’의 실체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지배 세력이었던 무나카타 종상씨들은 삼한의 소도제천 문화에서 가장 존귀한 신상神像을 모시고 건너간 도래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환단고기』 완역본
『오순제 박사의 대마도 역사기행』
『쓰시마 여행기』 2001안보회
『단군문화기행』 박성수
『삼국유사』 일연
『해동제국기』 신숙주
『일본은 한국이더라』 김향수
『일본민족문화의 원류와 일본국가의 형성』 오카마사오
<참고영상>
일본 매일방송 <종상대사와 오키노시마>
일본 SAGA TV <오키노시마의 보물>
종상대사∙오키노시마 관련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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