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를 통한 잃어버린 역사의 복원과 정립 (2)
道紀 149. 5. 31(금), 환단고기를 통한 한국고대사 정립
식민사학의 핵심
식민사학의 핵심은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임나일본부 등인데, 중고등 학생이 배우는 교과서의 핵심도 다 이런 내용입니다.
동방 역사의 근원을 파괴한 원죄를 안고 있는 『사기』를 쓴 한나라 사마천司馬遷(BCE 145경~BCE 85경)은 비극의 인물입니다. 이광李廣이라는 장군의 손자인 이릉李陵(?~BCE 74)이 흉노의 대군과 맞서 힘써 싸우다가 항복을 했는데, 무제가 이릉 일족을 몰살하려 하자 이릉의 친구 사마천이 변호하다가 궁형宮刑을 받았습니다. 흉노 왕 선우는 나중에 이릉을 사위로 삼았어요.
역사 강도 위만衛滿이 번조선에 망명을 요청하자 준왕準王이 ‘그러냐? 너 진심으로 나를 모실래? 그러면 내가 서방의 수비대장을 맡겨 주마’ 해서 고양이한테 생선가게 맡기듯이 수비대장으로 임명했어요. 그런데 위만이 해가 지나자 왕검성으로 쳐들어와서 성을 빼앗아 버렸잖아요. 그때 준왕이 쫓겨나서 전라도 군산群山으로 왔어요.
위만이 번조선을 빼앗은 지 86년 뒤에,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 군대와 1년 이상 싸웠습니다. 한나라의 좌장군 순체荀彘가 육군을 이끌고,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수군을 이끌고 와서 왕검성을 쳤습니다. 그 결과 우거가 패망당해 죽어버렸어요. 위만이라는 역사 강도가 번조선의 주군을 내쫓았는데 번조선 백성들이 위만의 손자에게 충성을 다해서 순종했을까요?
안함로安含老의 『삼성기』에서는 ‘위만이 절거서비일우窃居西鄙一隅, 서방 귀퉁이 조그만 곳을 도적질하여 차지했는데, 번한 왕 준準이 싸웠으나 당해 내지 못하고 바다로 도망하였다’고 간단하게 썼습니다.
위만이 번조선에 오기 훨씬 전에 번조선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천여 리 땅을 뺏겼습니다. 그래서 번조선이 위축됐어요. 그런데 진개라는 자는 일찍이 서력 전 300년경에 번조선에 인질로 와 있었어요. 번조선 왕이 아들처럼 잘해 주고 풀어줬는데 침략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개가 나중에 형가荊軻와 힘을 합쳐서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서 죽었습니다. 진개나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는 바로 당대에 비참하게 죽거나 얼마 못 가서 패망해서 영원한 역사의 어둠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일웅일호와 토템
우리가 『삼국유사』 「고조선」 조를 보면 “위서魏書에 운云 유단군왕검有壇君王儉이 입도아사달立都阿斯達하시고 개국호조선開國號朝鮮하시니 여고동시與高同時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군조선 건국에 대한 일대 선언입니다. 누가 언제 어디에 단군조선을 세웠는지 분명히 밝힌 거예요. 그러나 위魏나라 사람 왕침王沈이 쓴 전적典籍은 문화의 원 종주宗主 조선을 드러냈다고 해서 후대에 다 소각되어 버렸어요.
단군조선은 과연 어디서 왔는지 알려주는 것이 ‘고기古記’입니다. 우리의 옛 기록, 고기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석유환국昔有桓國’입니다. 이 환국에서 아버지가 아들 환웅을 보냈는데, 그 환웅이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환웅천황이 종통의 상징인 천부인天符印, 우주 경전 「천부경」과 어인御印을 가지고 온 겁니다. 이렇게 우주 광명의 나라, 동서 문명의 종주인 문화의 조국에서 환웅천황이 왔어요. 그런데 여기에 ‘일웅일호一熊一虎’가 나옵니다. 환웅이 도통을 열어 주는데 토족인 호족虎族과 이주족인 웅족熊族이 찾아온 겁니다.
일웅일호가 온 것을 도학적으로 해석한다면, ‘일심을 가진 호족과 일심을 가진 웅족, 두 사람이 찾아온 것’으로 볼 수 있어요. 그 사람들이 환웅께 ‘신의 계율을 지키면서 신과 하나 되는 참마음으로 사는 사람, 환국의 광명의 백성이 되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환단고기』에서는 ‘신계지맹神戒之氓’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웅족문화는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루마니아에는 웅족 축제가 있었어요. 사람들이 곰 탈을 쓰고 잔치를 합니다. 3만6천 년 전의 프랑스 쇼베 동굴에는 곰 그림이 있어요. 유럽이 ‘베를린 베어’, 곰 문화로 도배가 돼 있습니다. 일본에도 곰 축제가 있고 곰 지명이 아주 많이 있어요. 중국의 역사 시조 황제헌원도 유웅씨有熊氏입니다.
그런데 많은 문화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곰을 영원한 친구, 형제같이 여겨서 토템으로 숭배했습니다. 영적으로 지켜 주고, 교감하는 것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조각이 유고슬라비아에서 나왔어요. 한 8천 년 전에 나온 작은 조각인데 곰 아기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면 호족문화는 어떠한가? 중국에 호족문화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 투루판박물관吐魯番博物館에 가보니까 호랑이를 숭배하는 이족彛族의 문화가 아주 강렬해서 깜짝 놀랐어요.
남미에서 사람의 심장을 꺼내서 신의 제단에 바친 것도 일종의 타이거 문화입니다. 지금도 산신을 숭배하는 순수 샤먼들은 호랑이를 산신의 심부름꾼, 산신의 대행자, 사자라 말하고 있습니다. 삼신·칠성 문화에서 보면 호랑이는 삼신의 사자 기능을 하는 면이 있어요. 그래서 호족을 폄하하면 안 돼요.
단학회와 대종교의 관계
『환단고기』 위서론에서 강하게 걸고넘어지는 것은 『환단고기』와 대종교大倧敎의 연관성입니다. ‘『환단고기』는 해학 이기, 운초 계연수, 한암당 이유립 이런 사람들이 나철(나인영)의 대종교와 얽혀서 대종교 교리를 빌려다가 꾸민 것’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와 홍암弘巖 나철羅喆(1863~1916)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같이 뭉쳤어요. 해학이 홍암보다 열다섯 살 많은데요. 호남 3대 명문장의 한 분인 해학이 기억의 천재인 애제자 계연수를 만나면서, 『환단고기』를 감수, 교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광무光武 원년(1897)이었어요.
두 사람은 그 후 1905년에 일본에 가서 일본 왕에게 동양평화론을 주창하려다가 그냥 돌아오고, 1907년에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해서 두 사람 다 귀양을 갑니다. 그러고서 1908년 12월에 동지 여남은 명이 모여서, 홍암과 노선을 같이할 것인지 토론했는데, 역사관이 서로 달라서 해학과 홍암 두 분이 같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1909년 3월 16일 대영절大迎節에 단학회檀學會가 생겼어요. 해학 이기는 그 해 7월에 서울 한 여관에서 굶어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홍암은 47세 되던 1909년에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 신위를 모시고 단군교를 만듭니다. 이 단군교가 이듬해에 대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1년에 『환단고기』가 나왔어요. 홍암은 1916년에 황해도 구월산에 가서 단군왕검께 제천의식을 올리고 거기서 자결을 합니다.
그런데 단학회를 만든 해학 이기는 고성固城 이씨 직계 후손으로서 『환단고기』 내용의 70%가 넘는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전수받은 분입니다. 단학회는 초대 회장 이기를 거쳐서 계연수, 최시흥, 이덕수, 이용담, 이유립까지 회장을 이어 왔는데, 이분들은 대종교와 완전히 갈라섰어요.
대종교와 단학회에서 나온 「단군세기檀君世紀」도 서로 다릅니다. 대종교의 김교헌이 쓴 『신단실기神檀實記』 속의 「단군세기」와 단학회의 정진홍이 편집한 『단군교 부흥경략』 속의 「단군세기」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단학회는 환인과 환웅, 단군을 환국·배달·조선을 개창한 삼성조三聖祖로 봅니다. 실존 인물, 실제 제왕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나 대종교에서는 환인은 천신天神이고, 환웅은 천신의 아들이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단군이 실제 통치자로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47세 고열가 단군까지 인정했어요. 이렇게 근본이 다르기 때문에 양립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뒤에 단학회와 대종교가 너무 외롭고, 가난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사상적이라기보다 인간적으로 문화운동을 함께하게 됩니다.
위서론자들의 주요 논점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아주 쉬운 말로 모든 걸 뒤집어버리는 것입니다.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岦(1907~1986) 선생이 일찍이 「커발한」이라든지 여기저기에 글을 실었는데, 위서론자들은 그 글에 대하여 ‘이랬다저랬다 딴소리하고, 자기도 모르는 소리 하고, 이중적인 언사를 쓴다’고 비판합니다. 위서론자들의 주장 중에서 ‘『환단고기』라는 책은 원래 없었다. 그것은 『환단휘기桓檀彙記』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태백일사太白逸史』도 원래는 『태백유사太白遺史』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책으로 나오게 된 한 백 년 과정을 검토해 보면 『환단휘기』라는 것은 전혀 다른 책입니다. 『환단휘기』는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드러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태백진훈」 등 4대 경전에 주석을 붙여서 단단학회에서 1971년에 낸 책입니다. 『태백일사』라는 책도 『태백유사』가 아니라 원래 『태백일사』입니다. 해학 이기가 광무 원년, 2년 지나면서 『단군세기』를 처음 찍어낼 때 『태백일사』를 필사본으로 냈습니다.
다만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 선생이 1920년에 밀정 감연극甘演極의 고발로 끌려가서 얼마나 맞았는지 사지가 부러졌어요. 그래도 굴복하지 않으니까 사지를 자르고 그 시신을 압록강에다 처넣었습니다. 이유립 선생의 아버지 이관집이라는 분은 만주 관전현에 있던 학당인 배달의숙倍達義塾에 가서 역사를 배웠습니다. 계연수는 1899년에 「천부경」 주석서도 내었어요.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이런 것을 깊이 공부하지 않고 문서를 제대로 해석하지 않아요. ‘천부경은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1916년에 발견해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1911년에 발간한 『환단고기』 초판 속에 어떻게 천부경이 나올 수 있느냐’고 하면서, 다 조작된 것이라 주장합니다.
계연수 선생은 「천부경」을 발견한 경위를 밝힌 편지를 단군교에 보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천부경은 설교지경設敎之經이다.’ 「천부경」은 신교, 신의 가르침을 베푼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상금유전처尙今遺傳處’라는 말이 나와요. 이것은 ‘아직까지 남아 전하는 곳’으로 해석해야 됩니다. 「천부경」은 9천 년 전부터 구전지서口傳之書로 내려오다가 사슴 문자로, 전서篆書로 기록되었고 그것을 최고운崔孤雲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신라 이후로 전해 내려온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이 ‘상금尙今’ 두 글자를 잘못 해석해서, ‘계연수가 천부경을 처음 발견했는데 어떻게 그 전에 주석서를 냈다는 거짓말을 하느냐’고 몰아붙인단 말입니다.
계연수 선생이 1917년에 쓴 편지에 따르면, 선생이 묘향산에서 「천부경」 석각石刻을 발견했습니다. 선생은 이미 1899년에 「천부경」의 주석서를 냈기 때문에 그 석각을 보고 ‘아! 이거 천부경이네’ 하고 깨달았고, 지필묵을 가지고 다시 찾아가서 탁본을 떴어요. 그런데 글자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실망했습니다.
위서론자들이 제기하는 위서론 시비에서 취할 만한 것도 여기저기에 있어요. 그러나 그런 위서론이 있다고 해도 『환단고기』의 역사문화 정신을 읽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술어가 바뀐 것이 있다고 해서 『환단고기』의 원형역사관이 전혀 훼손되지 않습니다.
또 안함로安含老의 『삼성기三聖紀』와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삼신기三神記』라는 책이 있는데, ‘커발한 1, 2호를 보니까 원래 삼성기는 안함로가 쓴 게 아니라 행촌 이암이 가지고 있던 삼신기라 하였으니 그 삼신기에 내용을 가감해서 신라 때 고승 안함로의 이름을 넣어서 삼성기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삼성기』의 실체가 이러하니 『환단고기』는 더 볼 것 없이 조작된 것이라는 겁니다. ‘유사역사학은 이렇게 저자도 조작하고 내용도 조작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삼성기』와 『삼신기』 두 권은 별본입니다. 판본이 달라요. 성서의 구약이나 신약을 보면 여러 판본이 있잖아요. 『삼성기』와 『삼신기』를 비교해 보면 안함로의 『삼성기』가 황금시절 문화 언어에 훨씬 가까워요. 안함로의 『삼성기』에 ‘동녀동남童女童男’, ‘사백력지천斯白力之天’이라는 말이 있고 그 아래에 ‘자정여정子井女井’이라는 말이 있어요. 자정여정이라는 말은 아무나 못 쓰는 겁니다. 자정여정은 원형문화 역사가 살아있던 천수백 년 전에 안함로가 쓴 언어예요. 『삼신기』에는 ‘남정여정男井女井’으로 돼 있습니다.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자정여정이 실제로 전해 오는 족속이 있어요.
이른바 유사역사학이라는 것은 본래 유럽 역사상 만행을 저지른 왕이나 히틀러, 무솔리니 같은 전쟁광, 많은 사람을 죽인 나쁜 지배자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그런 나쁜 자들의 역사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천도교, 대종교, 보천교 같은 종교는 독립운동의 사령탑 노릇을 했습니다. 1920년대 당시 보천교는 세계 종교사상 유례가 없이 빠른 시일 안에 6백만 교도를 모았습니다. 지금의 청와대는 보천교의 십일전十一殿의 청와靑瓦를 뜯어다가 지었기에 그 이름이 ‘청와대’가 되었어요. 특히 보천교에서는 독립운동 심장부 상해임시정부에 거금을 보냈어요. 그래서 조선총독부에서 저 보천교, 천도교, 대종교를 ‘유사종교’, ‘사이비 종교’라 한 겁니다. 불교, 유교, 기독교는 종교이고, 민족종교나 무교巫敎는 사이비 종교라 하는 거예요.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그 ‘사이비’를 따다가, 역사문화의 원형을 복원하는 진정한 대한인에게 갖다 붙여서 ‘사이비 역사학’이다, ‘유사역사학’이다 이렇게 몰아세웁니다.
그러므로 위서론자들이 사이비 역사학,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글을 쓸수록 업보만 더 무거워집니다. 그러니 『환단고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좀 더 밝은 마음을 가지고 조국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마음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다 함께 통일의 밝은 역사문화를 여는 쪽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정통 사서의 성립사
끝으로 『환단고기』라는 정통 사서의 성립사成立史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역사서가 과거에 아주 많았어요. 단군조선 때 『배달유기倍達留記』가 있었고 「신지비사神誌秘詞」도 있었어요. 『환단고기』에서 구체적으로 전하는 「신지비사」에 환국, 배달, 조선, 치우천황의 역사가 나와요. 사실은 지금 남아있는 동방 최초의 역사서 「신지비사」 하나에서 역사를 다 찾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 때도 「신지비사」에 주역註譯을 붙인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지비사」를 조선 왕조 세종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직접 불질러버렸어요.
그 뒤에 『단군기檀君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가 있었고 고구려 때 『유기留記』, 신라 때 『국사國史』 백 권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남북국 때도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단기고사檀奇古史』, 『표훈천사表訓天詞』, 『조대기朝代記』 등 여러 책이 있었어요.
쭉 내려와서 조선시대 때 『태백일사』와 『규원사화揆園史話』가 나옵니다. 북애자北崖子가 쓴 『규원사화』는 40여 권의 사서를 참고하여 상고사를 바로잡은 책입니다.
환국, 배달, 조선을 다룬 이런 사서에서 우리가 꼭 취할 만한 내용이 있는데도 위서론자들은 무조건 부정하고 있어요.
위서론 시비의 대표적인 예는 기독교 신학에서 백 년 동안 시비를 벌이고 목숨 걸고 싸운 겁니다. 거기에 저자, 연대가 제대로 나와요? 불교 팔만대장경에 시비 거는 사람 있어요? 『논어』, 『맹자』에 시비 거는 사람 있어요?
그러나 『환단고기』는 저술한 인물의 신원이 비교적 자세합니다. 『환단고기』 전체 다섯 사람의 저자 가운데 원동중元董仲은 본명이 원천석元天錫(1330~?)입니다. 원천석은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의 직계 스승이었지만 조선 왕조를 따르지 않고 돌아서 버렸어요. 이분이 동중董仲이라는 호를 썼어요. 진晉나라 때 동호董狐라는 사관이 역사를 예리하게 판정하고 사필이 강력했는데, 원동중이 동호를 좋아해서 자기 호를 ‘동중’이라 한 겁니다. ‘제2의 동호’라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유교를 따르다가 보니 뿌리를 잃어버리고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밖에 모르지만, 원동중은 그 이전 환국·배달·조선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삼성기 하』에 열여덟 분 환웅의 족보를 실었어요.
행촌杏村 이암李嵒과 원동중은 같은 고려 말 왕조에서 일했고. 범세동范世東(?~1395)과 원동중은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원동중과 범세동은 『화해사전華海師全』이라는 놀라운 책을 편집하여 완성했어요.
우리는 이런 정통 사서를 쓴 분들에게 정말로 늘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환단고기』의 출간과정
『환단고기』 출간과정을 여기서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은 ‘우리가 원래 천자국’이라는 것을 내세운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첫해, 광무光武 원년(1897)에 해학 이기가 제자 계연수를 만나면서 『환단고기』의 감수와 교정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단군세기』를 내고, 그 다음해에 『태백일사』와 「천부경」 주석서를 내었어요. 그러면서 1911년에 태천泰川의 백관묵 진사와 삭주朔州의 이형식 진사 집에서 내려오던 『삼성기』를 비롯해서 다섯 가지 책을 묶은 『환단고기』를 음력 5월 5일 광개절廣開節에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1920년에 감연극의 밀고로 계연수 선생이 끌려가고 배달의숙 학당이 잿더미로 사라지면서 3천여 권의 소중한 9천 년 역사의 서류도 불구덩이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광복이 되고 1949년에 이유립 선생이 청주에 왔다가 대전에 머무를 때 대한민국 사주학의 일인자 이석형이라는 분과 같이 역사운동을 했어요. 그때 오형기吳炯基라는 분이 『환단고기』를 베껴 썼습니다. 이 『환단고기』가 1979년에 두 번 인쇄되었어요. 이어서 1980년에도 찍었습니다. 오형기는 한암당과 아주 가까운 분이었어요. 오형기는 한암당이 돌아가시자 장례위원장도 했지만 이후 행적을 잘 알 수 없습니다.
『환단고기』와 『태백일사』가 그 책 제목과 내용, 골간이 조작됐다고 하면서 트집을 잡고 또 그 부분적인 수정, 보정 작업에 대해서도 학문적으로 시비를 거는 것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일부 학자가 그렇게 트집 잡는 것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환단고기』를 ‘환빠’들의 책이라 합니다.
이런 위서론의 영향 때문에, 사단법인 대한사랑에서 미주 지역에 『환단고기』를 기증하려 할 때 심지어 ‘위서이기 때문에 사절합니다’라는 반응이 나온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의 환국·배달·조선 역사 인식
여기서 우리 대한민국 탄생 배경이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관한 영상을 잠깐 보겠습니다. 이 영상에서 보듯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1926년에 ‘환국은 절대적 이데아의 세계요, 남조선은 지상천국적 이상 목표’라는 말을 했어요. 육당은 ‘남조선 사상’이라는 나름대로 놀라운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19년 3.1독립운동과 그 후 1930년대, 40년대 임시정부 활동에서 『환단고기』에 나오는 인류 창세 역사의 출발점 환국과 동방 문명의 원 주인인 배달, 단군조선을 강조했어요.
동방의 모든 왕들이 단군조선의 6세 달문達門 단군을 모시고 만주 장춘에서 환국, 배달과 과거의 왕업에 감사 올리면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한 대천제의 기원문, 제천문으로 「서효사誓效詞」(신지비사神誌秘詞)가 있습니다. 제가 연세대학교에서 이 「서효사」를 자세하게 강독한 적이 있어요.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하야 흥방보태평興邦保太平이로다’라는 「서효사」 한 구절을 인용해서 조소앙趙素昻(1887~1958) 선생이 삼균사상三均思想의 맥을 잡았어요. 이분은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선생과 친했는데 아마 「신지비사」에 관통한 문화의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삼균사상은 ‘하늘과 땅과 인간은 일체, 하나’라는 생각에서 나왔어요. 하늘, 땅, 인간이 하나라는 것은 인류 창세 역사 이래로 영원한 진리의 절대 근본 주제입니다.
『환단고기』의 사서 가치와 원형문화 정신
그러면 『환단고기』의 진정한 가치를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이른바 임나일본부가 어디인지 분명히 나온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일본 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임나任那는 원래 경주 아래 바다 쪽에 있다고 합니다. 윤내현 교수님이 쓴 『한국 열국사 연구』에서는 『환단고기』를 인용하여 ‘임나는 대마도’라 했습니다.
대마도에 삼가라三加羅가 있는데 중앙에 인위가라仁位加羅가 있고, 위쪽에 좌호가라佐護加羅, 아래쪽에 계지가라鷄知加羅가 있었어요. 고구려, 신라, 백제가 각기 여기를 다스렸어요. 이 대마도, 임나를 사령탑으로 해서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문화를 전수하고 일본 고대 국가를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따르면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임나를 한반도 남부 가야에 옮겨놓고 그 지역을 북쪽으로 더 확대시켰어요.
1990년에 김해金海 대성동 고분의 대형 목곽분에서 유물이 나왔는데 역사학자들이 다 놀랐어요. 금관가야의 왕권을 상징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나온 거예요. NHK 특파원들이 와서 그걸 보고 ‘임나일본부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폐기처분해야 된다는 거예요. NHK에서 발간한 잡지 내용을 자세히 보면, 거기서 나온 유물을 근거로 할 때 거기에 강력한 왕권이 있었고 따라서 임나일본부가 가야를 다스렸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근래에는 임나일본부를 기껏 왜의 외교 사절이 안라국安羅國 등에 가서 근무한 것으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둘째는, 『환단고기』의 『북부여기』가 부여사를 완전하게 복원해 주는 유일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의 머리인 환국·배달·조선의 뿌리가 뽑히고, 환국·배달·조선에서 여러 나라 시대 즉 열국시대로 가는 출발점인 부여사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이 북부여와 동부여의 차이를 모르고, 동부여와 서부여의 차이도 모릅니다.
부여사의 출발점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는 해모수가 태어난 임술년 4월 8일인데, 『환단고기』 기록에는 그것이 180년, 3주갑周甲 앞섭니다. 해모수解慕漱가 서력 전 239년에 웅심산에서 북부여를 열고 이듬해에 단군조선 본조의 47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내가 왕정을 더 이끌 수 없으니까 너희 오가五加가 연정을 해라’ 해서 공화정시대로 들어갔어요. 6년 공화정이 끝난 서력 전 232년에 해모수가 단군조선을 계승했습니다. 당시 번조선의 제후로 있던, 기자箕子의 후손 기비箕丕가 왕이 되었는데 이 기비가 해모수를 도왔어요.
지금 남아있는 중국 역사서,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이 임술년이 180년 뒤의 임술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해모수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 실린 『북부여기』를 보면 해모수는 고주몽의 고조부입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고주몽의 아버지는 고모수高慕漱(옥저후 불리지)예요. 고구려는 북부여라는 나라의 이름을 바꾼 것이지 고주몽이 창건한 게 아닙니다.
장수왕長壽王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위해서 비를 세웠는데 이 광개토대왕비문에 ‘우리 아버지는 시조로부터 17세손’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시조’는 해모수입니다. 고주몽부터 치면 광개토대왕은 13세손입니다.
북부여의 4세 고우루高于婁 단군 때 한무제가 쳐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한사군 논리에 빠져서 ‘대동강 한사군 전쟁’으로 알고 있어요.
한무제는 북부여를 쳐들어오기 전에 중국 서방 36국을 평정하고 거기에 사군四郡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사군을 배치해서 진정한 대천자, 진명천자眞命天子가 되려 했어요. 진시황보다 훌륭한 대천자가 되려는 야망이 있었던 겁니다. 한무제는 신선을 좋아하고, 하늘의 우주정치 통치자 삼신상제님의 진정한 아들이 되겠다고 밤새 제사를 지내기도 했어요.
흉노를 정벌하고 서방을 평정한, 중국 5천년사에서 가장 강력한 대제왕 한무제도 번조선의 우거右渠 왕을 쉽게 무너뜨리지 못했어요.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면 좌장군 순체, 누선장군 양복이 서로 공을 다투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모두 벌을 받았습니다. 순체는 기시형棄市刑을 받고, 양복은 벌금을 내고서 평민이 되었어요.
당시 조선족은 독립의지가 강력했지만, 이간계離間計에 넘어가서 번조선의 귀족들이 연합하여 우거 왕을 죽여버렸어요. 『환단고기』나 『사기』 「조선열전」을 읽어보면 패수, 상하운장, 왕검성이 한반도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도 네 개의 한나라 식민지 군을 평안도, 황해도 지역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평안도 평양에서 단군조선이 망했다는 겁니다. 위만조선도 그 도읍이 대동강 평양이라는 거예요.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중국과 일본이 저지른 역사 조작을 그대로 추종하고 신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상고 역사가 이렇게 비뚤어져 있는 거예요.
번조선이 망한 뒤에 한무제가 북부여로 계속 쳐들어왔을 때 서압록 사람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한나라 군대를 계속 격파했습니다. 『환단고기』에 그 얘기가 나오죠. 고두막한이 그 뒤에 ‘나는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다. 내가 동방 문명의 진정한 주인이고, 천제지자天帝之子니까 왕권을 내놓아라’고 북부여 고우루 단군에게 요구했습니다. 고우루 단군이 병들어서 죽자, 고두막한이 5세 고두막高豆莫 단군이 됩니다.
그때 고우루 단군의 아우 해부루解夫婁가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동쪽 우수리 강 쪽으로 가서 가섭원迦葉原에 동부여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아마 그런 악업 때문인지 모르지만 고두막 단군의 아들인 고무서高無胥 단군은 딸밖에 못 낳았어요. 고주몽의 왕비가 된 소서노召西弩는 고무서 단군의 따님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로는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이 해모수와 연애를 하다가 임신해서 동부여 해부루 왕에게 가서 고주몽을 낳아 길렀다는 것이죠. 주몽이 워낙 활을 잘 쏘고 명민하니까 동부여 태자 대소帶素와 그 일파가 죽이려고 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주몽에게 ‘도망가서 한 판 차려라’고 한 겁니다. 그 어머니가 사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6백 년 왕가의 마지막 왕인 테레지아Maria Theresia(1717~1780) 여제女帝보다도 더한 여자예요. 아마 주몽에게 ‘북부여 단군에게 딸밖에 없으니까 북부여 큰집에 가서 그냥 사위가 되어라. 그러면 빼앗긴 왕조를 그냥 찾는 거야’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고주몽은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되어서 왕위를 물려받고 나라 이름을 고조할아버지 해모수의 고향 이름을 따서 고구려라 했습니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를 읽어보면 고주몽의 시조 할아버지의 고향이 고구려라 돼 있잖아요.
동부여의 3세 대소 왕이 고구려 괴유 장군의 한칼에 목이 떨어져서 나라가 망하고, 대소의 종제가 서쪽으로 가서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 즉 서부여를 세웠습니다. 부여잔여사夫餘殘餘史라 할 수 있는 서부여의 마지막에 의려국依慮國 왕과 그 아들 의라依羅가 백제를 거쳐서 일본으로 갔어요. 놀랍게도 오사카에 의려신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사 이름을 바꿔놓아서 일본 사람들도 모르고 궁사도 몰라요.
조선과 관계되는 역사를 알 수 있는 신사의 이름을 바꿔놓은 것은 명치유신의 죄악입니다. 일본 신사 기행을 하다 보면 참 흥미도 진진하지만 역사의 근본을 왜곡한 것을 알면 기가 막히죠.
셋째, 단군조선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력 전 239년에 북부여가 서고 그 다음해에 단군조선의 본조本朝인 진조선이 망합니다. 그러고 나서 44년 뒤인 서력 전 194년에 위만이 번조선에 쳐들어와서 왕위를 빼앗았는데, 그때 준왕準王이 망명하여 익산益山에 들어오고 남삼한 중 하나인 마한이 생깁니다.
넷째로 단군조선의 건국 과정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단군할아버지의 사주도 나와요. 단군왕검은 신묘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나셔서 열네 살 때 어머니 웅씨왕녀熊氏王女의 친정인 대읍국(웅씨국)에 가셨어요. 왕검이 영이 열려서 모든 걸 보니까, 웅씨국 왕이 섭정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24년간 섭정을 하다가, 38세 때 웅씨국 왕이 전쟁에 나가서 세상을 뜨자 고향 단국檀國으로 왔어요. 단군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입니다. 웅씨녀, 웅씨국이라는 언어는 동북아 역사 비밀, 여진족女眞族의 비밀을 푸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여진족은 중국 청나라의 왕족입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Nurhachi(1599~1626)가 건주建州에서 왔는데, 그 누르하치가 임진왜란 때 ‘나도 가서 도와주고 싶다’고 하니까 명나라 황제가 ‘너는 거기서 네 일이나 하라’고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때 세력을 기른 것입니다.
그리고 근세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고조할아버지는 여진족에게 가서 다루가치라는 벼슬을 했어요. 그래서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열 때 여진족 출신 이지란李之蘭 장군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청나라와 우리나라 마지막 왕조를 연 사람은 올라가서 보면 여진족이고, 웅씨녀 집안과 연결이 됩니다.
중국에 가면 대읍루大挹婁 왕의 큰 동상이 있는데 그곳 박물관이 몇 년 전에 벼락을 맞았어요. 중국 사람들이 역사 뿌리를 조작해서 그런지 큰 벼락을 맞아서 박물관이 문을 닫아 버렸어요.
다섯째로, 환웅천황의 계보를 전하고, 단군조의 근원인 배달국 신시의 역사 체계를 자세히 밝혀 줍니다.
여섯째로, 동서 인류 문화의 영원한 조국, 천산 동방의 12환국이 나옵니다. 12환국은 다민족 국가의 연맹체일 수도 있는데, 기독교의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로 추정되는 우루국虞婁國이 있고, 서양 문명의 근원인 수메르를 연 수밀이須密爾라는 나라도 있어요.
그리고 동서 문명의 건국이념, 경영 사상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도, 재세이화在世理化의 도가 환국에서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역사가 조작되어서, 환웅이 아니라 단군이 10월 3일 개천절에 홍익인간의 도로 나라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의 근원인 『카발라Kabbala』라는 경전이 있는데, 이 경전은 「천부경」, 「삼일신고」를 응용한 겁니다.
일곱째로,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배달·조선의 언어가 있습니다. 문자로 기록되어야 역사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삼성기 하』에서 ‘부도지문符圖之文’이라 한 것은 부적 같고 그림 같은 문자입니다. 이것은 환국시대에 있었던 그림문자로 볼 수 있어요.
여기 도표에서 보듯이 신시 배달 때 녹서鹿書, 산목算木이 있었습니다. 태호복희 때는 용서龍書가 있었어요. 4,700년 전인 치우천황 때 우서雨書가 있었고 또 화서花書(투전목)도 있었어요. 단군조선 때는 신전神篆이 있었고 3세 가륵嘉勒 단군 때 지금 한글의 원형인 가림토 38자를 만들었습니다.
행촌 이암의 손자 우의정 이원李原이 세종대왕에게 『단군세기』를 바쳤는데, 세종대왕이 『단군세기』에 실린 가림토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입니다.
서울대 김주원 교수가 『훈민정음-사진과 기록으로 읽는 한글의 역사』라는 멋진 책을 냈어요. 책 서두를 읽어보면, 그때 『성리대전性理大全』 80권이 들어왔는데 그 첫째 권에 있는, 우주관을 설명한 주렴계周濂溪(1017~1073)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오행사상 영향을 받아서 소리 시스템을 정립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맞기도 하지만, 세종대왕은 『환단고기』에 실린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보신 겁니다.
여덟째로, 웅족문화를 알려 줍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6,500년 전의 곰 조각이 나왔습니다. 새끼 곰을 가슴에 안고 있는 이 조각상의 모습이 인간에게 큰 감동을 준다고 합니다. ‘이미지의 진화’라는 부제가 붙은 『The Myth of the Goddess(여신의 신화)』라는 책을 보면 “The bear is probably the oldest sacred animal of all.”, 곰은 만물 가운데 가장 오래고 신성한 동물일 것이라고 했어요.
곰은 코끼리, 개보다 잘 걷고 인간에게 친밀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유라시아 대륙, 동북아가 대략 곰을 토템으로 했어요.
중국의 역사 수수께끼 가운데 진짜 놀라운 게 하나 있습니다. 중국 역사의 시조를 4,700년 전 황제헌원黃帝軒轅이라 합니다. 그때 동방에는 자오지慈烏支 환웅천황 즉 치우천황蚩尤天皇이 있었어요. 그런데 2,200년 전 진시황이 세운 진秦 제국이 15년 만에 망하고,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했어요. 그래서 한족이라 합니다.
한 패공沛公 유방이 항우와 의형제를 맺었지만 서로 싸웠어요. 우리 상생방송에서 그 내용을 다룬 80편짜리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는데 며칠 있으면 끝나요. 『환단고기』에는 유방이 마지막에 승리한 이유가 나옵니다. 유방이 치우천황 사당을 지어놓고 천제를 올린 겁니다. 그러고서 유방이 항우를 무너뜨렸고 항우는 자결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방이 곰을 숭상하고 좋아했어요. 또 동방을 침략하여 완전한 천하통일을 이루려 했던 한 무제의 무덤 곁에 정자를 지어놓았는데 거기에 거대한 곰 동상이 있어요. 그리고 바로 그 박물관에 보관된 당대의 삼족정三足鼎이나 사족정四足鼎을 보면 그 밑 부분에 전부 곰을 새겼어요.
일웅일호一熊一虎는 북두칠성의 신성과, 신의 사제司祭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미국 인디언 문화를 보면 거대한 벽에 아홉 마리 곰이 북두칠성처럼 새겨져 있어요. 제가 뉴욕에서 강연할 때 그걸 한번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북아에서는 시베리아 산産 순수 호랑이가 있습니다. 호랑이 문양을 보면 마치 산맥이 늘어선 것 같아요. 그래서 옛날부터 산신들이 호랑이를 타고 다닌다고 하고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합니다. 호랑이가 삼신의 수호자 역할을 한다고 믿은 거예요. 그래서 일웅일호를 토템으로 봐야 됩니다.
마지막 아홉째로, 이 우주의 자연정신의 혼백을 신성한 수, 3으로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제사장 왕들이 문명을 창조하고 나라를 열 때는 우주의 신성한 수를 근본으로 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알려고 피타고라스Pythagoras(BCE 582년경~BCE 497년경)의 고향인, 터키 옆에 있는 사모스 섬을 갔어요. 피타고라스를 기념하는 조형물 밑에 히랍어로 ‘우주의 중심 수는 3이다’라고 씌어 있었어요. 피타고라스가 3수의 신비를 캐려고 저 중동을 통해서 이집트로 갔고, 또 티베트를 거쳐서 중국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3수 사상의 원류는 어디인가? 그것은 동방에서 보면 환국·배달·조선이고 서방에서 보면 수메르입니다.
런던박물관 근방에 있는 시골 박물관을 들어가면 삼신할머니가 있습니다. 유럽의 저 끝을 지배한 겔트족은 삼신 신성문화를 가장 예술적으로 디자인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놀라운 디자인 양식이 많아요.
우리가 유라시아를 보면 몽골의 삼 울루스, 카자흐스탄의 삼 주스, 헝가리의 삼 구스, 러시아의 삼 루스, 우즈베키스탄의 삼 우즈에서 알 수 있듯이 세 사람, 세 구역이 국가 건설의 밑자리를 만듭니다.
단군조선의 삼한 즉 진한·번한·마한이 한반도 밑으로 내려와서 백제·신라·가야의 전신인 삼한이 되었어요. 이것이 북삼한과 남삼한입니다. 이 삼한이 내려가서 대마도 즉 임나의 삼가라三加羅가 되고, 또 내려가서 유구국(오키나와)에 있는 산남, 중산, 산북이라는 삼산三山이 된 겁니다. 오키나와에 가 보면 그것을 삼국三國이라고도 말합니다.
중국에 가보면 축아지생祝兒之生, 아이를 낳는 것을 삼신三神이 축복해 준다고 해서, 연꽃 위의 동자가 삼신을 안고 있는 상이 중국 전역에 다 있어요. 여기 사진을 보면 부처님처럼 생겼는데 단전 쪽에 삼신의 기운을 받고 감사하는 제스처를 쓰고 있어요.
사실 전 지구촌에 『환단고기』의 원형문화 역사정신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이나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젊고 뛰어난 가이드들이 『환단고기』를 읽지 않았는데도 『환단고기』의 원형문화 정신에 맞게 유물을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 역사관과 부합하는 최근의 역사 연구
우리나라의 뛰어난 역사학자들이 『환단고기』를 인용하고 『환단고기』의 역사문화관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병도, 최태영 같은 분도 있습니다. 이병도 박사는 세상 떠나기 전에 ‘단군조선은 실제로 있었어. 그게 신화가 아니야’라고 했어요. 대한민국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도 다 아는 일입니다. 와세다 대학에서 같이 공부한 최태영 박사가 이병도 박사에게 ‘죽기 전에 회개해야 돼. 민족 앞에 올바로 말하고 나하고 책이나 하나 쓰자’ 해서 『한국상고사입문』을 썼어요. 그 책에서 환국·배달·조선을 인정했습니다.
윤내현 교수는 최근에 낸 두 권 책에서 환국, 배달 다음에 웅녀와 결합한 시간대와 단군조선을 ‘무리 사회’라 해서 근대 서양역사관 논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삼제 교수는 『고조선 사라진 역사』에서 『환단고기』를 그 종교적 성격을 트집 잡아서 비판하고 부정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서울대 교수를 지내신 한영우 같은 분은 『다시 찾는 우리 역사』에서 ‘우리는 아사달족인데 저 산동성 아래까지 큰 동질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원방각圓方角이라든지 우주광명 문화의 하늘·땅·인간 삼신일체 사상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원역사 복원과 국통맥 바로 세우기
환국·배달·조선 이래 우리 국통맥 전체를 보면, 이제 마지막 아홉째 나라에서 열째 나라로 넘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남북통일을 넘어서 지구 문명을 수용하고 크게 융합하여 진정한 지구촌 통일문명 시대를 열 수 있는 출발점은 동학입니다. 참동학 증산도의 가을 우주 문명의 역사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개벽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린 시원 창세 역사를 반드시 복원해야 됩니다. 우리 시대 제일의 사명은 자랑스러운 역사 계보, 국통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은 환국·배달·조선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렸습니다. 벌써 백 년 전에 독립군을 양성하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가를 보면 ‘우리 우리 배달 나라’를 노래했어요.
2015년에 국내에 개봉한 「드래곤 블레이드」(감독 이인항)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에 신분이 하락한 중국 장군과 동방으로 도망쳐 내려온 로마 장군의 의리와 목숨을 건 전투를 다룬 영화인데요. 이 영화에서 어린 눈먼 황제가 부른 노래가 있어요. 그 노래가 신흥무관학교에서 불렀던 교가 이상으로 감동을 줍니다. 그 노래 가사 ‘로마여 영원하라’를 제가 ‘배달이여 영원하라’로 고쳤는데 한번 들어 보세요.
(음악 감상)
오늘 토론회가 닥쳐올 남북통일 역사 대전쟁을 대비하는 힘찬 용사, 조국의 통일을 성취할 진정한 역사광복군을 기르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을 다 함께 소망하면서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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