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문화탐방기 | 신사神社의 나라, 일본을 가다!
지난 11월 16일 일본 오사카에서 환단고기 북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본부와 지방의 많은 일꾼들이 자원봉사자로 이번 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콘서트 후에 이어진 역사탐방은 한반도에서 전래된 동방 신교가 일본 문화의 뼈대로 자리를 잡고 있음을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신 김보람, 김선영, 주미라 성도님의 역사탐방기행문을 종합하여 <일본역사탐방 후기>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일본으로 출발!
11월12일 드디어 오사카로! 오사카 도장으로 출국하는 당일이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설레임을 가득안고, 핸드폰 로밍신청을 한 후, 부산지역 성도님과 대구에서 온 성도님을 만나 함께 체크인 센터로 갔다. 우리가 탑승하게 될 비행기는 ○○항공. 저가항공이라 기내 수화물은 기내용 가방과 소지품 가방 단 2개여야 하고 무게는 10㎏까지만 허용 가능하며, 위탁 수하물은 20㎏까지 허용된다고 한다. 규정을 몰랐던 우리는 뒤늦게 무게 조절을 위해 물을 빼고 인터넷으로 수하물 추가신청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체크인을 마치고, 무사히 출입국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이번 오사카북 콘서트를 통해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성도님도 계셨고, 외국 여행이 처음이라는 성도님도 계셨다. 여러 성도님들이 하시는 말 속의 설레임이 나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다들 창밖 풍경을 보느라 바빴고, 짧은 비행시간 동안 티켓을 구입하는 승객들이 눈에 띄었다. ○○항공의 좋은 점은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난바까지 갈 수 있는 Pass권을 바로 비행기 내에서 820엔의 저렴한 요금에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돈을 주면 영수증과 뒤에 도장을 찍어주는데 나중에 공항에 내려 지하철 타는 탑승구 앞에서 교환을 하면 티켓을 준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지하철 노선도와 지도를 얻어 지하철에 탑승하였다. 오사카 도장이 있는 코리아타운까지의 시간은 약 1시간, 창밖을 통해 보이는 일본의 풍경은 조용함 속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나라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도장으로 가는 동안 9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게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오사카 도장으로 전화를 해야 했다. 결국 오사카 도장의 성도님께서 직접 자전거를 타고 길 잃은 고양이처럼 서있던 우리를 정말 감사하게도 데리러 와주셨다. 늦은 밤까지 저녁을 못 먹은 우리를 위해 포정님께서 맛있는 라면을 끓여주셨다. 그렇게 오사카 도장 성도님들과 첫 만남을 가졌다. 우리는 도장 바로 앞에 있는 ‘히로(ヒ-ロ-)네’라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짐을 풀고 첫날 밤을 맞았다.
일본의 거리, 그리고 일본 사람들
이번에 일본 오사카에서 10일간 머무르면서 오사카, 나라, 교토를 다녀왔다. 일본에 대해 느낌과 생각을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일본인들은 공공질서를 정말 잘 지킨다는 것. 공공장소에서 쓰레기통을 찾아볼 수 없고 화장실은 너무 깨끗했다. 거리에서도 버려진 쓰레기 하나 볼 수 없었고 그 흔한 전단지도 전봇대에 붙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정말 친절했다. 나는 일본어를 전혀 모르지만 별 두려움 없이 일본을 여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친절 덕분이었다. 실례로 오사카 난바(難波) 역에서 우리가 묵는 숙소인 니폰바시역(日本驛)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일본 아가씨에게 길을 물어봤다. 그 아가씨는 우리 일행을 지하철을 타지 않고도 걸어갈 수 있는 지하도로 인도해 주었다. 우리가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는 지점까지 와서야 자신을 길을 돌아갔다. 그 시간이 아마 십여 분이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내가 만난 모든 일본인들은 너무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더욱 심각해진 한·일 양국의 문제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감춰진 속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아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하다. 사람들은 일본이라는 나라는 마음에 안 들지만 일본사람은 정말 친절하다고 말한다. 그들의 참 모습은 무엇일까? 개개인의 일본인과, 일본이라는 나라가 과연 따로일 수 있을까? 역시 우리에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북 콘서트 활동 시작! - 일본에서의 첫 활동(13일)
오사카에서 맞이하는 첫날 아침, 우리는 오사카 도장에서 청수를 올리고 태을주 수행과 함께 하루의 문을 열었다. 먼저 사전 오리엔테이션 시간이 있었다. 수호사님과 포정님께서 직접 오셔서 일본 환단고기 활동 시의 주의사항과 일본 문화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셨다.
일본에 살아있는 우리 문화를 체험하고 직접 발로 뛰는 홍보활동을 하기 위해 부푼 마음으로 도장을 나섰다. 물론 두 손에는 환단고기 북 콘서트 홍보 팜플릿을 푸짐하게 들었다. 먼저 일본 문화를 상징하는 신사神社가 보고 싶었는데 마침 도장 앞에 있는 미유키모리(御幸森天神宮) 신사로 향하였다. 원래 닌토쿠텐노(仁德天皇)가 산돼지 사냥을 하면서 쉬던 숲에 왕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 한다. 이곳에는 백제 왕인王仁 박사가 닌토쿠텐노(仁德天皇)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와서 지었다는 노래비가 세워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신사의 모습은 옛 우리 민족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았던 신교문화와 매우 닮아 있다. 일본 신사 앞에서는 액운을 쫓기 위해 금줄이 달려있었고, 신사 옆에 있는 돌비석에는 그 신사를 위해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는다고 한다. 이어 미유키모리 신사에서 태사부님께서 직접 방문하셨던 구마다신사(杭全神社)까지 약 두 시간 정도 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현지인들에게 구마다 신사로 가는 길을 여러 번 물어보았다. 그런데 길을 모르는 시민들은 다른 사람에게 대신 길을 물어봐주기도 하고, 헷갈릴 법한 길까지 직접 함께 가주기도 하며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꼭 환단고기 콘서트에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걸으면서 ‘일본역사는 한국의 역사와 매우 연관성이 많다. 그리고 한반도에 살던 백제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펼쳐진 역사가 일본의 역사다.’라는 얘기와 함께 환단고기 팜플릿을 손에서 손으로 전달해 주었다. 곧이어 도착한 구마다 신사에는 큰 나무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약 천년 정도 된 매우 영험한 나무라고 한다. 바로 신사를 지키는 살아있는 신단수의 모습이다.
나라에서의 활동 (14일)
오늘의 대학생 활동 장소는 나라(奈良)로 정했다. ‘나라’라는 지명은 우리의 나라라는 말이 그대로 일본으로 들어가 지명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많은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였고, 약 70년 동안 일본의 수도로서 역할을 하였다. 열차를 타고 간 나라 역에서 얼마 걷지 않아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사슴이었다. 공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고 먹이를 먹고 있는 사슴들이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여유로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사슴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슴이 우리 손에 들려져 있던 지도를 먹기 시작했다. 공원에 붙은 경고문에는 사슴에게 정해진 먹이 외에 종이는 주지 말라고 적혀 있었으므로 서둘러 종이를 가방과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에 사슴과 함께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어 우리 일행은 사슴공원을 지나 토다이지(東大寺)로 향했다. 동대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축조 건물 다이부스덴(大佛殿)이 있다. 그곳에는 일본 3대 불상 중 하나인 다이부스(大佛)가 모셔져 있다. 다이부스는 정면 폭 57.5m, 높이 49.1m, 옆면 50.5m로 세계 최대 규모다. 동대사가 처음 세워진 것은 752년 4월 9일이다. 놀랍게도 고대 한국인들이 그 건축의 주인공이란다. 바로 구다라인(백제인) 행기行基(668~749) 큰 스님과 양변良弁(689~773) 큰 스님, 신라인 심상대덕審祥大德(8세기) 큰 스님이다.
고대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 즉 큰 나라라고 불렀다. 백제를 동경하고 백제 것을 최고로 여긴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 부는 한류열풍보다 더 거센 구다라 열풍이 이미 고대에서 불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의 대표적인 유물이라면 사찰, 불상, 불교문화, 이런 것들일 텐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다양한 문물이 일본에 건너갔고 그것은 고대 일본인들의 실생활까지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지금의 다이부스덴 건물은 1691년도에 다시 축조되었다. 다이부스덴을 짓고 다이부스를 제작하는데 들어간 비용은 한화로 무려 6조원 이상이라고 한다. 직접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았는데 정말 사람 키의 7배나 더 커보였다. 다이부스덴이 있는 동대사는 처음에 쇼무덴노(聖武天皇)가 어린 나이에 죽은 황태자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이날 동대사에는 외국관광객보다 더 많은 수의 일본 청소년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경주 불국사를 찾는 것처럼 그들도 동대사를 단체로 방문한 듯했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일본의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한국 가수, 드라마, 음식을 얘기하며 먼저 다가와 주었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한국에 대해 배타적으로 느낄 것이라는 일본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의 현대 문화를 알고 즐길 뿐이지 원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정수를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한국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청소년들을 보며 진짜 한국의 문화에 대해 그들이 깨어난다면 지금 동북아에서 벌어지는 역사전쟁의 모습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상생의 관계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을 구경하며(15일)
환단고기 북 콘서트 하루 전날이다. 우리는 오사카 도장에서 다 같이 모여 성공적인 행사를 기원하며 고사치성을 올렸다. 도장에서 음복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행사 장소인 오사카 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 역사박물관은 일본의 대표 방송국 NHK와 함께 붙어있었다. 사람들이 역사박물관과 방송국을 자유롭게 오고가는 모습이 새롭게 느껴졌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은 오사카의 중심, 오사카성 인근에 위치하여 멋진 전망을 자랑하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다. 수학여행이나 소풍 외에는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사람들을 찾기가 드문 한국의 박물관 모습이 겹쳐지며 살짝 씁쓸한 기분^^.
먼저 역사박물관의 제일 꼭대기 층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초기 일본 사람들이 입었던 의관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 있었는데 우리와 너무 닮았다. 옷과 부채 그리고 그들의 표정까지 백제 사람들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느낌이다. 근처 난바궁에서 출토된 유물들도 백제 사람들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박물관에서 바라보는 오사카성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권력을 엿볼 수 있었다. 오사카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垓字 사이의 물은 외곽에서 끌어다가 지은 것이며, 정문으로 보이는 오테몬의 성곽 문이 하나로만 지어져 있었다.
이렇게 지은 이유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만약, 사방위에 문이 있으면 그만큼 많은 군사력과 인력들이 동원되고 다양한 문을 통해 성이 함락되기 쉽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 성을 물로 둘러싸고 성의 정문을 한 군데만 만들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다 안전하게 성을 지키려 했다.
우리는 내일 행사가 열리는 4층 행사장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했다. 먼저 도착한 성도님들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잠시 후 행사시 나눠주는 책을 담는 봉투를 구매하기 위해 나왔는데, 오사카 역사박물관 근처에는 다이소가 없어 근처 시장으로 갔다. 처음으로 타 본 일본의 차는 웬걸 운전석이 오른쪽이고 조수석이 왼쪽이다. 한국과 정반대다. 일본은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보다. 차들의 운행방향도 바뀌어서 마치 길을 무단으로 건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에 앉아 지도를 보는데 우리와 다른 방향에 나는 방향감각을 잃고 그저 최종 목적지만 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수호사님께서 오신 적이 있어서 길을 찾아 무사히 시장에서 봉투를 사고 오사카 역사박물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고는 다른 성도님들과 함께 책 포장 작업을 했는데 갑자기 빨리 해야 한다는 말이 들렸다. 일본에서는 봐주는 것 없이 바로 5시가 되면 셔터문을 내린다는 것이다. 한국은 5시에 문을 닫는다 해도 여유 시간이 허용되고 또 행사를 준비하는 측의 사정을 봐주기도 하지만, 일본에는 그런 게 전혀 안 통한단다. 어떻게 보면 매정해 보이지만 그만큼 칼같이 철저한 그들의 국민성이 아닐까?
점심은 역사박물관 밖 벤치에서 몇몇 대학생 성도님들과 아침에 싸왔던 주먹밥으로 대신했다. 식사 후 우리는 나고야 성, 구마모토 성과 더불어 일본의 3대 성 중의 하나인 오사카 성城으로 향했다. 오사카 역사박물관 위에서 보았던 오사카 성은 작아 보였는데 실제로 돌아보니 엄청 컸다. 당시 체구가 작았던 일본인에게 오사카 성은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 즈음에 방문하여 오사카 성의 야경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삶과 오사카 성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은 아쉽게도 4시30분까지 입장마감이었다. 방문을 다음 기회로 미루며 아쉬움을 달랬다.
오사카 환단고기 북 콘서트(16일)
오후 1시에 시작하는 북 콘서트 준비를 위해 장비를 나르는 방송팀, 경호팀, 접수팀 등이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서둘렀다. 행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무사히 진행될 수 있도록 신중을 기하면서 살피지 못한 문제들은 없는지 세세히 확인하였다. 12시가 넘자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들어오기 시작했다. 1시가 되자 사회자가 행사 안내를 시작했고, 큰 화면에는 그동안 진행되었던 환단고기 북 콘서트 영상들이 등장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사카 환단고기 북 콘서트가 시작된 것이다. 곳곳에 배치된 안내요원들이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친절히 자리로 안내하며 객석이 다 채워지자 다양한 분야 관계자들의 축사가 이어진 후, 환단고기 역주자이신 종도사님의 말씀이 시작되었다.
종도사님께서는 일본의 신교문화와 천조대신, 진무천황에 관한 이야기들과 일본에 전해진 우리의 문화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실제 사진과 더불어 알아듣기 쉽게 문화의 전수과정에 대해 전해주셨다. 행사 참여자 중에는 멀리서 새벽 6시에 출발하여 아들과 함께 북 콘서트에 참여하신 일본인도 있었다. 한국인, 일본인 할 것 없이 새로운 역사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종도사님의 말씀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우리 대학생들은 만찬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만찬장에 입장시키고 나서야 우리는 다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난바 역으로 향했다.
역사탐방 - 일본의 천년 고도, 쿄토
일본
660년 백제가 망하면서 많은 왕족과 귀족들과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나라奈良에 왕궁을 짓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었다(710~794). 일본 속에 또 다른 백제가 세워진 것이다. 백제의 멸망으로 일본은 최대의 수혜를 받은 셈이다. 그들은 백제가 완전 멸망함에 따라, 새 국가의 개념을 정립하여 자신들의 뿌리가 한국계라는 것을 숨기고 단절하기 위해 덴무천황(天武天皇) 때(720년) 『일본서기日本書記』를 다시 쓰게 되었고, 이런 역사서 찬술을 계기로 왜국은 ‘日本’으로 국호를 개칭하여 독자적인 체제로 전환한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보면 일본 역사의 기원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단군조선의 3세 가륵단군 때(BCE 2173)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곳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처형하였다. 이 소시모리의 후손으로 36세 매륵단군 때의 인물인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이 일본으로 건너가(BCE 667) 그곳을 정복하고 스스로 천왕이라 칭하였다는 기록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신무천황의 즉위를 BCE 66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불과 7년 밖에 차이 나지 않는 두 사건은 동일 사건임에 분명하다 .
행사가 끝난 다음날부터 우리는 일본 역사탐방을 시작했다. 첫날은 교토로 가게 됐는데, 단체버스가 교토 도시를 들어서는 순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들어선 기분! 옛것의 정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교토의 풍경 때문이었다. 교토의 첫 코스는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쿄토를 방문하는 관광객치고 청수사를 방문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고대 일본 정복왕인 오진왕(應神, 4~5세기 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청수사 입구에는 사기를 막는다는 해태모양의 이누상이 세워져 있었다. 청수사 안쪽 군데군데엔 기도를 올리는 많은 신단들이 있었고, 원형 그대로 보존이 돼 있는 문화재들은 참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청수사의 경치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우리가 간 시점부터 날씨가 추워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는 가을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이 ‘야사카신사(八坂神社)’이다. 야사카 신사는 액과 화를 면해주고 상업을 번성하게 해준다고 하여 시민에게 친밀감을 주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교토의 시내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 이 신사는 고구려에서 일본 황실로 온 부사副詞인 이리시노오미(伊利之使主)가 신라국 우두산의 신神 스사노오미코토의 신주神主를 이곳 야사카 터전으로 옮겨 모셔와서 제사드린 데서 창건되었다. 스나노오미코토素盞烏尊의 별명이 우두천황이며 역병 퇴치의 신이기도 하다. 야사카 신사는 일명 ‘고구려대사’로 부르기도 한단다. 본래 이 신사의 이름은 기온사(祈園社)였다. 야사카 신사는 이 ‘기온사’의 사당 명칭이 개명된 것이다. 팔판은 당시 이 지역의 이름이면서 고구려 사신 이리지가 하사 받은 성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것은 야사카 신사의 본당 앞 중간에 정자 같은 곳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축제 때 신에게 춤을 바치는 신만의 무대로 따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와! 신을 위해 무대까지 따로 만들어 놓다니. 일본은 정말 정말 신을 잘 모시는 나라다. 다시 한번 절감^^.
야사카 신사 앞에는 기온거리가 펼쳐져 있다. 이 기온거리는 매년 7월마다 열리는 ‘기온 마쯔리축제’로 유명한 거리이기도 하다. 신라신을 모시는 행사가 일본에서 가장 큰 축제가 되었다는 생각에 왠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이곳에서 먹기 위해 기온거리를 거닐었는데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화려한 전통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광경은 교토 시내에서는 자연스런 풍경이었다. 전통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들의 정서를 또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복을 입고 시내 한복판을 돌아다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 또 고대!
그 다음에 간 곳은 신라의 농신을 모신 후시미이나리(伏見稻荷) 대사이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 촬영지로 유명한 이곳은 ‘우카노미타마노카미(宇迦之御魂大神)’라는 농업신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신라 신은 이 고장의 벼농사 풍년을 관장할 뿐 아니라 일본 전국 벼농사의 풍년도 지켜주는 종주가 되는 최고의 신령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심부름하는 암수 여우상이 좌우를 보좌하는 모습으로 세워져 있는데. 좌측의 여우는 만자 문양의 열쇠를 물고 있으며 우측의 여우는 여의주 구슬을 물고 있다. 그리고 국화 문양의 16개 잎은 8음8양을 상징하며 일본 황실의 상징이라고 한다. 이처럼 일본에는 신교문화의 뿌리와 원형이 그대로 간직되고 있었다.
나라와 고베 지진메모리얼 파크
18일, 마지막 역사탐방의 날이 밝아왔다. 나라에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외국인의 경우, 여권을 지참하면 무료로 입장이 가능했던 나라현립 가시하라고고학 연구소 부속박물관이었다. 사전에 여권을 지참하고 도착했던 우리는 이 박물관에서 사전 브로셔를 받고 이동했다. 박물관 내부에서는 우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발자취와 더불어 일본에 남은 우리 문화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수많은 말 모양을 한 하니와(埴輪, 토기의 일종)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독특하였다. 사람 형상의 하니와는 입을 벌리고 머리에 구멍이 뚫려져 있었는데, 수행을 통해 백회로부터 하늘의 기운을 이어받고 살아가는 고대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원방각, 하늘의 기운을 그대로 땅으로 내려받는 모습을 형상화한 토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일본인들도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고자 하였지만, 그 원 고향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후 카시하라 신궁(橿原神宮)을 방문하였다. 일본에서는 신궁-궁-대사-신사의 위격으로 신을 모시고 있는데 신궁은 일본의 천황이 직접 관리하기에 가장 신성시되는 곳이다. 카시하라 신궁은 메이지 시대인 1889년에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세워졌다. 기원전 660년에 나라를 건국한 제1대 진무천황과 황후를 모신 곳이다. 이곳을 통해 일본의 계보를 알 수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카시하라 신궁 입구에는 2674년이라는 연수年數가 적혀져 있는데 이 말은 1대 신무천황이 일본을 세운지 이 정도가 되었다고 적어놓은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신무천황이라는 이름 옆에 황후의 이름이 나오고, 그 이름에 50이라는 숫자가 적혀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황후의 이름을 사전으로 찾으면 일본의 대국주신의 딸로 나오며, 대국주신은 신무천왕의 장인이고, 일본의 국조신이다. 일본 사람들도 잘 방문하지 않는 카시하라 신궁에서 일본의 족보를 찾고 그들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다음은 대국주신을 모신 일본 최초의 오래된 신사인 오오미와 신사(大神神社)로 향하였다. 오오미와 신사는 첫 등장부터 새로웠다. 신사로 가는 길목에는 작은 탑이 보였고 그 앞에는 흰 계란이 올려져 있었다. 걸음을 옮겨 올라가서 안으로 도착해 보니 생각보다 작았는데 그 이유는 산 전체를 본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신사는 인사를 하는 배전拜殿이 있고 신을 모셔둔 본전本殿이 있는데 오오미와 신사는 신사의 원형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뒤에 보이는 산 전체를 자연신으로 모시며 본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쉽게 말하면 산 밑에 있는 성황당으로, 인사를 드릴 수 있는 배전만 있는 모습이 새로웠다.
배전을 바라보고 우측에는 큰 나무가 두 갈래의 뿌리를 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여기서 오오미와 신사에서는 왜 계란과 술을 올리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오오미와 신사에서는 대국주신을 모시고 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이 그 나무에서 흰 뱀이 나온 모습을 보고 대국주신이 화생하였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오오미와 신사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뱀이 가장 좋아하는 계란을 올리고 있다. 이 나무 밑둥에는 큰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을 통해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흰 뱀이 사람들이 올리고 간 계란을 먹는다고 한다.
천리교 본당 방문
다음으로 우리가 향한 곳은 천리교 본당이었다. 천리교 본당이 있는 이곳의 지명 역시 천리시였다. 이 도시는 시민 전체가 천리교를 믿는 교인들로 이루어져 있고 시 안에 병원,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기숙사 등 모든 생활시설이 다 갖춰져 있다. 제일 먼저 입구를 지나 본당 안으로 향했는데, 내부에서는 엄마와 딸 혹은 친구끼리 와서 조용히 앉아 진지하게 수행을 하고 있는 교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어떤 체계를 정하고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하고 싶을 때 자유롭게 하는데 24시간 내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수행하는 공간은 동서남북으로 인간이 잉태되었다는 정육각형 기둥조각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며 둘러싸여 있는데 그 소리가 서로 오가며 소리의 조화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설명이 끝나고 나올 무렵 근처 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청소년들이 다들 본당으로 와서 주문을 읽고 있었다. 처음에는 '웬 아이들인가’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천리시의 학생들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과 마치고 난 이후에 본당으로 와서 전교생이 함께 수행을 하고 하루를 마감한다고 했다. 이를 보며 우리들도 아침저녁으로 태을주 수행을 함께 하며 하루를 열고 하루를 마감해 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주문을 읽을 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아래 위로 가볍게 움직였는데 그 의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니 그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기원과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봉사하겠다는 다짐이라 한다.
천리교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검정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본당 내부에서 단체로 수행을 하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쉬지 않고 직접 본당 내외부 청소를 하는 광경이었다. 청소를 하고 있는 그들은 주문수행과 다른 또 하나의 수행을 하는 듯 사뭇 진지하면서 걸레질 한 번에도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는 걸레질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그 걸레는 수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너무 깨끗하였고 자신의 죄를 청소와 수행을 통해 씻어내려는 모습처럼 보여졌다. 천리교인들의 수행 모습과 신앙 자세를 직접 지켜본 이번 천리고 본당 방문은 나의 신앙을 한번 되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이 되었고, 그 여운은 한국에 도착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후 우리는 일정을 마치고 오사카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지 않은 채 우리는 고베로 향했다. 오사카에서 40분 정도 떨어져있는 고베는 일찍부터 서양 문물이 들어와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항구도시로 야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우리는 모자이크에서 저녁을 먹은 후 고베항 지진 메모리얼 파크를 방문하였다. 그곳은 한신 아와지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메리켄 부두의 일부(안벽 60M)를 지진 당시의 상태로 보존, 견학할 수 있도록 정비한 공원이다. 고베를 방문할 때 처음에는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고베지진 당시의 전봇대와 도로를 그대로 보존한 모습을 보며 단 10초도 되지 않아 도시가 폐허로 변했다는 말에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은 신사의 나라
일본의 신사神社는 대부분 숲에 둘러싸여 있다. 한국의 절 하면 산이 떠오르듯 일본의 신사는 숲속에 있다. 신사 입구에는 ‘천天’자 모양의 문이 서 있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도리이(鳥居)라고 부른다. 분명 한국의 솟대가 변형된 형태이다. 신사 참배객들은 도리이 앞에서부터 인사를 하고 들어간다. 일본에는 무려 10만개가 넘는 신사가 있다. 매년 새해가 되면 인구의 80%가 신사를 찾는다고 한다. 석등이 늘어서 있는 단아한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신사 건물 앞에 한 쌍의 사자상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해태상이라고 알고 있는 이 사자상을 일본에서는 ‘고마이누(O犬)’라 하는데, 고마이누는 ‘고구려개’라고 한다. 이 고마이누는 해태상과 마찬가지로 악귀를 막는 수호자의 의미를 가진다. 신사 건물 앞의 한쪽 귀퉁이에는 약수터처럼 보이는 장소가 있다. 이곳은 데미즈야(手水舍)라고 불리는데, 사람들은 여기서 신 앞에 나아가기 전에 몸과 마음의 때를 물로 씻어낸다. 한국에서는 사찰입구에 약수터가 있어 물을 마시지만 일본에서는 손을 씻고 입을 헹구는 정화의식을 한다. 이것을 ‘하라이はらい’라고 부른다. 참배자들이 돈을 넣고 종이나 방울을 친 후 손뼉을 두 번 치면서 기원하는 신사 건물은 통상 배전拜殿이라 불리는 곳이고, 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본전本殿(=신전神殿=정전正殿)은 그 뒤쪽에 있다. 본전에는 각 신사의 제신과 신체神體(제신을 상징하는 예배 대상물로서 구슬, 거울, 검, 방울 등)가 모셔져 있으므로 일반 참배자는 출입 금지다.
일본의 신사는 신사라는 명칭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그 밖에도 신궁神宮이라든가 궁宮, 혹은 대사大社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신사도 적지 않다. 여기서 신궁이란 이세신궁이나 도쿄의 메이지신궁 등과 같이 주로 황실과 관계가 깊은 특별한 신을 모신 신사를 말한다. 이세신궁은 일본인들에게는 이슬람의 메카와 같은 정신적인 지주이다. 일본인들이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아마데라스 오미까미(天照大神)를 모시는 곳이다. 천조대신은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여 천황가문과 일본의 조상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원래 이세신궁은 고대에 한민족과 관련된 최고신을 모신 곳이었으나 7세기 말에 들어 일본이 소위 만세일계의 왕실계보와 고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천조대신으로 교체, 왜곡한 것이다. 일본 신도는 종교란 개념을 초월하여 일본인의 생활 정서에 밀착된 전통 문화이며, ‘종교 이전의 원초적 종교’인 것이다. 신사를 보면 원형문화인 신교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하고 뿌리깊게 그들의 삶속에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사 곳곳에는 대형 금줄(시메나와)이 걸려 있어 고대 한국의 신교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탐방을 정리하며
우리는 각성해야 한다, 과거처럼 다시 일본에게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도 역사사료, 현장유물, 문화철학의 근거를 제시하며 논리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올바른 역사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 어찌되었든 일본은 우리의 또 다른 형제국가이다. 상생의 도심으로, 문화 종주국으로서의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이번 일본 역사문화 탐방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고대 우리 조상들이 일본의 문화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하였다. 박물관에서 역사유물을 직접 보면서 또 역사현장을 탐방하면서 환단고기의 내용들을 생동감 있게 느껴보았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크고 많다. 한민족과 지구촌 형제들에게 잃어버린 역사와 원형문화를 되찾아줘야 하고 또 통일의 열매문화인 증산도를 통해 새 세상을 하나하나 건설해나가야 한다. 천리교는 단순한 교리 하나로 지금의 성장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최고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도 나태하고 게을렀다. 깊이깊이 반성하며 다짐했다. 상제님 진리로 도성덕립이 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며,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감사히 여기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겠노라고! 이번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게 보호해주신 천지일월과 조상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것으로 일본 역사 탐방 후기를 마친다. 보은.
글/ 주미라, 김보람,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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