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 도전 8편62장에 보면“상제님께서 옛사람을 평론하실 때는 매양 강태공, 석가모니, 관운장, 이마두를 칭찬하시니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인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이 네 분을 상제님께서 칭찬하셨는데, 과연 강태공은 어떠한 인물이며, 어떠한 공덕과 업적을 남겼는지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십년 경영으로 3600개의 낚시를 벌리다
태공망 여상은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인 서기전 12세기경 사람이다. 성은 강(姜), 이름은 상(尙)이며 자(字)는 자아(子牙)로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 四方제후의 장관)이 되어 우임금을 보좌했으며 치수사업에도 큰공을 세운 바 있었다. 그후 그의 선조가 여(呂) 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본성은 강씨이지만 봉지 명을 따라 씨를 삼기 때문에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렀다.
여상은 가난 속에서 곤궁하게 살며 언제나 책을 가까이하며 학문에 열중했는데 집안 살림은 부인 마씨가 맡아 뒷바라지를 했다. 하루는 마씨 부인이 들에 일을 나가면서 비가 오면 마당에 말려놓은 갱피를 거두어 놓으라고 당부를 하고 나갔다. 그후 많은 비가 내렸는데 마씨 부인이 집에 돌아와 보니 마당에 늘어놓은 갱피가 빗물에 다 떠내려가고 없었다.
그런데 여상은 비가 오는 것도 모르고 책만 읽고 있었다. 마씨 부인은 더 이상 가난한 살림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 재가를 해버렸다. 이후에도 여상은 여전히 책을 읽거나 위수에서 낚시를 하며 사색하곤 했다.
이 무렵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시대로 그 전후 시대상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나라의 조상인 ‘설`과 주나라의 조상인 ‘후직`은 모두 순임금 시대의 인물로 사도(司徒)와 농사(農師) 벼슬을 맡았는데 후에 상(商)과 태(邰)에 봉해졌다. 은나라는 설의 14대손 탕에 와서 하의 걸(桀)을 멸하고 상(商)나라를 건국했다. 이후 18대 반경(盤庚)에 가서 도읍을 은(殷)지역으로 옮기면서 은(殷)나라로 불렸다.
주나라는 후직으로부터 태에 살다가 4세 공유(公劉)에 이르러 ‘빈`으로 천도하였고 13세 고공단보에 이르러 기산(岐山)아래 주원(周原)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이때 비로소 나라이름을 주(周)라 부르게 되었다. 고공단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셋째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성덕이 있어 계력과 창에게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창은 서백(西伯)이라고도 불렸으며, 후일의 문왕(文王)이다.
이 당시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주왕(紂王)은 애첩 달기에 빠져 호화궁전인 녹대를 짓고 주지육림(酒池肉林)하며 향락과 사치를 일삼았고 간언하는 신하들을 포락지형(?烙之形)으로 처형하였다. 이후 민심은 떠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서백 창은 덕을 쌓고 인망을 얻어서 귀순하는 자가 많아져 날로 세력이 강해지자 주왕(紂王)은 서백 창을 유리에 감금시켰다. 이어 서백 창의 큰아들 백읍고를 죽여서 포를 뜬 다음 국을 끊여서 서백 창에게 갖다 줘서 “세상에서 서백 창을 소위 성인이라 하는데 그가 이 국을 먹으면 제 자식의 살점을 먹는 것이니 성인도 아니요, 먹지 않으면 성인이므로 죽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서백 창은 눈물을 머금고 국을 먹는 시늉을 했다.
한편 서백 창의 부하인 산의생, 굉요 등이 서백 창을 구해내기 위해 주왕에게 낙서의 땅과 미녀와 명마를 뇌물로 바쳤다. 주왕은 크게 기뻐하며 서백 창을 석방하고 궁시(弓矢)와 부월(斧鉞)을 하사하며 천자인 주왕을 대신하여 서쪽 제후들을 다스리게 했다.
하루는 서백 창이 사냥을 나가려 귀갑으로 점을 쳐보니 사관(史官) 편(編)이 ‘얻는 것은 용도 아니요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며 큰곰도 아닌, 사냥에서 얻는 것은 인재다.`라는 점괘를 얻었다. 서백 창은 3일 밤낮을 목욕재계하고 삼가다가 위수(渭水) 상류로 사냥을 나가 위수 번계(磻溪)에서 곧은 낚시를 하고 있는 여상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서백 창과 여상은 인재의 등용의 원리, 인심을 얻어 천하를 얻고 천하를 경륜하는 방법 등에 대해 문답을 하였다. 여상의 말을 다 듣고 난 서백 창은 경의를 표하며 절하고 나서 “우리 조상 태공 때부터 머지 않아 큰 성인이 나타나 우리 주(周)족을 크게 부흥시킬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당신이 바로 그분이요. 우리 태공께서 기다린 지 오래였소.” 하였다. 그 후 여상을 태공망(太公望) 혹은 태공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백 창은 태공을 자기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가서 스승으로 모시었다.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열다
서백 창은 매일 아침 단명전에서 조회를 마친 뒤에는 각료들과 함께 치란흥망(治亂興亡)의 요체에 관한 강태공의 강의를 들었다.
강태공은 서백 창을 도와 성수의 움직임을 살펴 절기와 일기에 따라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법을 가르치고, 주나라를 크게 융성하게 했으며 특히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강태공은 덕과 계책으로 제후들을 결속시켜 천하의 3분의 2를 주(周)나라에 귀속시키게 했다. 그러나 서백 창은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강태공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백 창의 뒤를 이어 아들 발이 무왕으로 즉위했다. 무왕은 고공단보를 태왕(太王)으로 계력을 왕계(王季)라 추존하였으며, 서백 창을 문왕(文王)으로 추존하였다.
무왕 13년, 주왕(紂王)을 정벌하고자 맹진에서 포고문을 발표하고 목야에 진을 쳤다. 은나라 백성들은 밥과 물을 가지고 나와 무왕의 군사들을 환영하였으며, 주왕의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잡고 무왕의 군대에게 길을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은나라는 멸망했다.
무왕은 은나라 수도를 점령한 이튿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에 나아가 상제(上帝)께 제사를 드렸다. 이어서 무왕은 공신들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으로 작위를 나누어 영토를 분배하고 제후로 봉함으로써 비로소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태공도 천하통일의 대공로로 제(齊)나라 땅 백 리의 영토를 받고 제후로 봉해졌다.
마씨 부인을 서낭신으로 봉함
제나라에 부임한 강태공은 처음에는 많은 이민족의 반항을 받기도 하였지만 정치를 개선하고 풍속을 존중하고 예의를 간략히 하는 등 다스리기에 노력하여 모두가 잘 동화되었다.
어느 날 강태공이 수레를 타고 시찰을 나갔다. 어느 거리를 지나는데 옛날 자기를 버리고 재가한 마씨가 들에서 갱피를 훑고 있었다. 내내 아무 것도 없는 집에 재가하여 갱피를 훑으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강태공은 수레를 멈추고 마씨를 불렀다. 마씨는 옛일을 후회하며 다시 자신을 받아주기를 간청했다. 이에 강태공은 한번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번 끊어진 인연은 다시 맺을 수 없다며 재가해 살고있는 마씨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떠났다.
이후 마씨 부인은 가난하게 살다가 어느 고개 마루턱에서 죽었다. 그후 강태공은 옛날의 자기 신세를 갚기 위해 마씨 부인을 서낭신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서낭신은 마을 수호신으로 마을의 액운을 막고 잡귀를 막는 신이다. 마씨 부인이 잡귀가 되어 몇십년 살다 없어질 운명을 강태공이 근 3천년이란 세월동안 향화를 받도록 해서 지난날의 은공을 갚았다.
귀신을 뜻대로 부리다
상제님께서 “강태공은 72후를 써서 귀신을 종처럼 부렸다.”(道典 4:115)고 하셨다. 강태공은 1년을 72후로 나눠(1후는 5일) 동식물 또는 기타 자연현상 변화의 징후에 근거하여 절기의 변화를 설명하고 이름을 붙여 농사에 이용하였다. 또한 강태공은 귀신도 마음대로 사역케 하는 신권을 갖추고 있었는데 중국설화 속에 많은 일화들이 전해온다.
『봉신연의』에 보면 주왕의 애첩 달기는 소후의 딸로 은주역 청당에 묵을 때 곤륜산의 천년 묵은 암 여우가 그녀의 혼백을 빼앗고 그녀의 몸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주왕의 비(妃)가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게 되자 곤륜산에서 40년간 수행을 한 강태공이 도술로 여우를 물리치게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정산에 좋은 진흙이 있는데 미꾸라지 정령의 방해로 수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육로로 운송해야 했다. 이에 강태공이 신조(神釣)로 미꾸라지 정령을 잡아 수로를 내도록 하였다. 정산에는 그 증거로 조어대(釣魚臺)가 있다.
그리고 『도전』에 보면 상제님께서 “봉서사의 진묵은 3둔(遁)을 하였고 주나라의 강태공은 52둔을 하였으나 나는 이제 72둔을 다 써서 화둔(火遁)을 트리라.”(道典 4:146) 하신 내용이 있다. 『봉신연의』에 의하면 강태공이 토둔(土遁) 수둔(水遁) 목둔(木遁) 등을 행하여 몸을 감추어 이동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이 강태공은 도술에 능통하여 귀신도 능히 뜻대로 부리는 신권이 있었다고 전한다.
신교의 맥을 중국 한족에 전수하다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을 쌓았던 강태공은 강족(姜族)으로 정통 동이족 출신이다. 강태공은 동방조선족으로서 신교의 한 맥을 중국 한족에게 전수하게 되는데, 그는 삼신 상제님의 가르침을 받아내려서 나라를 세우고 국가를 통치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삶의 좌표로 삼았다. 그의 저서인 『육도삼략』의 중심에는 동방 신교(神敎)의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있다.
사마천 『사기』의 「주본기」에 보면 “무왕이 주왕을 처단하고 이튿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에 나아가 남쪽을 향하여 모숙정은 맑은 물을 받쳐들고 위강숙보는 자리를 깔았으며 … 윤일은 축문을 읽어 주왕의 죄악을 상제께서 듣도록 명백히 아뢰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청수(淸水)를 모시고 상제께 고하는 부분은 동방 신교 문화의 원형이다. 또 『사기』 「 봉선서」에 의하면 “조정의 동남쪽에 태일단(太一壇)을 설하고 천일신(天一神) 지일신(地一神) 태일신(太一神)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천지인(天地人) 삼재관을 바탕으로 천일신, 지일신, 태일신으로서 삼신(三神)을 숭배한 제천행사가 있었는데, 이것이 동방 한민족의 신교(神敎)의 신관이다. 지금으로부터 8백년전 고려 공민왕 때 행촌 이암은 천일은 조화(造化)의 신, 지일은 교화(敎化)의 신, 태일은 치화(治化)의 신으로 정의했다.
강태공은 산동성 제나라의 왕이 된 후 동방신교의 삼신관을 서방 중국 땅에 뿌리내렸다. 이로부터 제나라에서 삼신과 치우천황과 천지일월에 제사하는 팔신제(八神祭)풍속이 더욱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팔신제는 천지의 여덟 신을 섬기는 문화로, 삼신 상제님을 모시는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음주(陰主), 양주(陽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 등의 신을 모셨다. 『사기』 좥봉선서좦, 『진역유기(震域留記)』에 의하면 진시황과 한고조까지도 팔신제를 봉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팔신제는 고대 중국문화 속에 살아있던 동방신교 제사문화의 원형이며 산 증거이다.
병법과 정치로 천하만세에 은혜를 베풀다
강태공이 지은 병법서인 『육도(六韜)』는 다른 병서와 달리 치세(治世)의 대도(大道)로부터 인간학 조직학을 논급하고 정전(政戰) 및 인륜을 논한 것이 특색이다. 또한 『삼략(三略)』은 감추어져 비전 되다가 진(秦)나라 시대의 황석공이 장량에게 전수하여 세상에 드러났다.
태공망의 육도가 역대 병법사상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후대의 손자(孫子) 오자(吳子) 위료자(尉?子) 이위공(李衛公) 등 중국의 제가(諸家) 병법사상도 『육도삼략』을 기간(基幹)으로 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6국의 재상을 지낸 유명한 유세가인 소진은 태공망의 병법서를 접하고 비로소 군왕들을 설득하여 천하를 경륜할 도를 터득하게 되었다.
또한 상제님께서는 “강태공이 제잔금폭(除殘禁暴)의 묘략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술법을 전수함으로부터 천하가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루었으되 그 은덕을 보답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동티막이로 ‘경신년 모월 모일 강태공 조작(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의(道義)에 합당하리오.” 하시며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게 되리라.”(道典 4:145) 하시며 공사를 보셨다.
예로부터 잡신을 물리친다는 제살(除煞)의 한 풍속으로 디딜방아를 짓고 나면 흔히 몸체에, 강태공이 태어났다고 하는 연월일시인 ‘경신년(庚申年) 경신월(庚申月) 경신일(庚申日) 경신시(庚申時) 강태공 조작(姜太公 造作)`이라고 쓴다. 이를 ‘방아상량`이라고 하는데 디딜방아를 고치거나 새로 놓을 때는 반드시 경신일 경신시에 맞추어 방아 동티(귀신을 노하게 하였을 때 받는 재앙의 하나)를 막고자 하였다.
이는 강태공을 내세워 잡귀가 덤벼들어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데, 우주원리로 보면 금극목(金克木)의 상극(相克)원리로 강한 금기(金氣)를 지닌 경금(庚金)과 신금(申金)으로써 목기(木氣)에 의한 동티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강태공은 160살을 살다가 죽었다. 80년은 초야에 묻혀서 가난하게 살았고 80년은 세상에 뜻을 펼치며 영광스럽게 살았다. 그래서 강태공의 삶을 두고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 이라고 한다. 강태공이 죽자 그를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사체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여상은 시해선(尸解仙)이 되었다고 믿었다. 또 일각에서는 『육도』라는 여섯 권의 병법서를 남기고 세상을 뜨자 영구(營丘)에 장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상제님께서는 강태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강태공이 십년 경영으로 삼천육백 개의 낚시를 벌렸음이 어찌 한갓 주(周)나라를 일으켜 봉작(封爵)을 얻기 위함이었으랴. 이를 널리 후세에 전하려 하였음이니라.”(道典 4:145) 강태공이 80평생을 가난 속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위수에서 10년 동안 삼천육백 개의 낚시를 벌려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후세에 천하사를 하는 심법을 전수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강태공의 이러한 삶은 상제님 일꾼들이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천하사에 임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도전』을 보면 상제님께서 “내 종자는 삼천년 전부터 내가 뿌려놓았느니라.”(道典 3:276)는 말씀을 하셨다. 3000여 년 전 강태공의 삶을 통해 후천 오만년 새 역사를 여는 우리는 지금 어떠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자.
<참고자료>
『육도삼략』이상옥 역해 명문당 / 『사기』 사마천 원저 김병총 평역 집문당 / 『봉신연의』 안능무 평역 솔출판사 / 『서경』 권덕주 역해 혜원출판사 / 『관통 증산도』 안경전 증산도종정 대원출판 / 『주대의 상제의식과 유학사상』 배옥영 지음 다른생각 / 『디딜방아 연구』 김광언 저 지식산업사
* 출처: 증산도 공식홈페이지(http://www.js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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