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선의 뿌리, 신교(神敎)를 밝힌 고운 최치원
이성욱(창원 상남도장)
신교(神敎)는 본래 뭇 종교의 뿌리로 동방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 그 도맥(道脈)이 면면히 이어져 왔나니 일찍이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包含三敎) 접하는 모든 생명을 감화시키는 것(接化群生)이라” (道典 1:8:1~2)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고 하는 최치원. 유불선의 뿌리가 신교(神敎)임을 밝혔고, 신라는 물론 당나라까지도 이름을 드날린 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보고 신선의 도를 닦아온 선인들의 신교의 맥을 짚어보기로 하자.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며
고운 최치원(崔致遠,857~?)은 신라시대의 학자로서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며, 경주 사량부 출생이다. 6두품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자질을 인정받아 당나라에 유학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에 올랐다. 고려 현종 때 문창후로 봉해졌고, 학문과 문학에서 깊은 업적을 남겨 문인들은 그를 ‘동국문종’이라고 추앙하고 있다. 또한 후일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발만 남긴 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서 후인들에게 ‘유선(儒仙)’으로 불린다.
경상도와 전북 일대에는 지금도 최치원의 행적이 전해진다. 옥구군에 있는 바위에는 최치원이 먹을 갈던 곳과 무릎자국이 남아있다고 하며, 해운대에서는 도술로 바위에 자신의 호를 새겼다고 한다. 유적뿐 아니라 출생설화를 비롯하여 전설도 많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최고운전』에 의하면, 최치원의 글 읽는 소리가 당나라 장안에까지 들릴 정도로 낭랑하였다고 한다. 이에 당나라에서는 신라에 큰 인재가 태어났음을 시기하여 사신을 보내 수수께끼를 내었는데, 최치원의 문장과 총명함에 놀란 당천자는 그를 장안으로 불러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뛰어난 기지와 용왕, 노구, 미녀 등의 도움으로 무사히 간계를 물리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최고운은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13세에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의 길에 올라,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881년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를 지었는데,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 군무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은 훗날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당시 당나라는 조금씩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고, 이방인인 최치원이 겪는 고독과 한계는 극에 달했다. 아픔과 좌절된 꿈을 시(詩)로 달래던 최치원은 결국 29세에 주위 관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친의 병을 계기로 신라로 귀국하였다. 큰 포부를 안고 귀국했지만 최치원은 다시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 문란으로 뜻을 펼 수가 없었다. 당시 신라사회는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도적 떼와 반란이 횡행했다.
891년 양길과 궁예가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망국의 그림자를 본 최치원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조>를 올려 왕이 이를 가납하였으나 골품제의 모순과 왕권의 미약으로 그의 개혁의지는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어디서도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한 최치원은 40대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풍류객으로 삶을 시작한다. 그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904년을 끝으로 보이지 않는데 세간에서는 그가 신선이 되어 등천하였다고 전한다.
붓을 휘둘러 난을 토벌하다
최치원의 문집을 모은 『계원필경』 서문을 보면, 최치원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며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최치원은 “다른 사람이 백번하면, 나는 천번하였다(人百之己千之)”라고 하며 유학시절의 역경을 적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남다른 학문열은 결코 출세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수없이 생각해 보아도 학문하는 것만 못합니다. 평생에 노력한 것이 오히려 헛될까 두려워서 출세의 길에 경쟁하지 않고 다만 유교의 道를 따랐습니다.… 오직 도가 장차 없어지는 것을 근심할 뿐 어찌 사람들이 나를 쉽게 알아주지 않음을 말하겠습니까?” 『계원필경 卷17』
또한 최치원의 남다른 철학과 정신이 더욱 잘 드러나는 것은 남아있는 저작과 시문을 통해서이다. 그 중 당나라 유학의 고독을 담은 「추야우중」과 말년에 은거하며 속세의 길을 훌쩍 뛰어넘은 경지가 잘 드러난 「가야산 독서당」이 대중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또한 황소의 난의 기세를 통렬하게 꺾고, 치민(治民)의 대의를 담은 『토황소격문』은 당대에 견줄만한 작품을 찾기 힘든 명문이다. 더욱이 역사상 붓으로 난을 토벌한 이는 고운 최치원 외에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런 경력에 힘입어 고려시대에는 후(侯)로 봉해졌고 심지어 조선문인들은 문천자(文天子)로 까지 숭상하였다.
“햇빛이 활짝 퍼졌으니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는가!
하늘그물이 높게 달렸으니 반드시 흉적을 베리라!”
(토황소격문 中)
저술로는 『계원필경』 20권과 『사륙집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이 있었고,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과 불교와 관련하여 법장화상전 1권과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전하며 <동문선>에 시문 약간이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방대한 저술이 있지만 전하여 오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최치원은 스스로 자신을 ‘유자(儒者)’로 자처하였다고는 하나 그의 사상은 유불선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는 중국의 선, 불, 유는 한민족의 본래 신교(神敎)가 다시 역수입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그가 쓴 <난랑비 서문>은 한민족에 면면히 내려왔던 신교의 정신을 확연히 드러내주는데 여기에서 최치원은 신교가 유·불·선의 뿌리임을 밝히고 있다.
國有玄妙之道하니 曰風流라.
국유현묘지도 / 왈풍류
設敎之源이 備詳仙史하니 實內包含三敎하야 接化群生
설교지원 / 비상선사 / 실내포함삼교 / 접화군생
且如入則孝於家하고 出則忠於國은 魯司寇之旨也오
차여입즉효어가 / 출즉충어국 / 노사구지지야
處無爲之事하고 行不言之敎는 周柱史之宗也오
처무위지사 / 행불언지교 / 주주사지종야
諸惡莫作하고 諸善奉行은 竺乾太子之化也라.
제악막작 / 제선봉행 / 축건태자지화야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난랑비 서문」)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베푸는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거니와,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접하는 모든 생명을 감화시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보면, 이는 곧 집으로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가 가르쳤던 뜻이요, 매사에 무위로 대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의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니라.”
마지막 화랑, 최치원
최치원은 문인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선인으로서의 구도행 역시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말년에는 시해법의 일종인 ‘가야도인법’을 저술하여 전하였다고 한다.
신라 중기 화랑인 물계자나 사랑(四郞)의 전설에서 보여지듯, 화랑의 정신은 멋과 풍류였다.1)
『청학집靑鶴集』을 쓴 조여적은 조선 단학의 계보가 광성자(廣成子)-명유(明由)-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문박-영랑-보덕-도선-최치원-위한조-편운자(片運子)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2)
반면 『해동전도록』에서는 태상노군에서 종리권 여동빈으로 이어지는 중국 도교가 종리권에서 당나라 유학생이었던 최승우를 거쳐 최치원을 통해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와 김시습 등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최치원은 비록 신라를 다시 부흥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이 진정한 풍류객의 길을 걸었고, 뛰어난 필치로 화랑의 정신을 후세에 전했다는 점에서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최치원이 말한 바대로 유불선의 뿌리이며, 우리 민족 문화의 뿌리인 ‘신교’는 수천년 역사의 굴절 속에서도 꿋꿋이 전해져 후대에 최수운의 ‘동학’으로 이어졌으며, 이제 가을의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자연섭리에 의해 상제님의 천지공사 속에서 완성되었다. 이제 후천개벽의 시운을 맞아 그 얼과 혼을 받은 증산도의 초립동이들이 다시 세계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깊어 가매 더욱 흥을 내어 북을 치시며
시 한 수를 읊어 주시니 이러하니라.
時節花明三月雨요 風流酒洗百年塵이라
시절화명삼월우 풍류주세백년진
철 꽃은 내 도덕의 삼월 비에 밝게 피고
온 세상의 백년 티끌 내 무극대도의 풍류주로
씻어 내니 우리의 득의지추(得意之秋) 아닐런가.
(道典 5:15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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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랑세기>에는 “화랑이란 선의 무리(仙徒)이다. … 선도들은 다만 신(神)을 받드는 일을 주로 하여 국공(國公)들이 그들을 따라 나란히 다녔고, 후일에 선도들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면려(勉勵)하였으므로,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이로부터 선발되었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여기에서 나왔으니 화랑의 역사는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전한다.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보면, “단(檀)은 배달(倍達)이고, 국(國)은 나라(那羅)이며, 군(君)은 임검(任儉)이다.(檀倍達 國那羅 君任儉)”라는 기록이 있다. 풍월도(風月道)의 ‘풍(風)’이 옛날에는 ‘발함 풍’이라 하였는데, ‘바람’, ‘배람’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월(月)’은 ‘달 월’이다. 이것을 이두식으로 읽게 되면 ‘발달길’또는 ‘배달(倍達)길’이 된다. 또한 풍류도라 할 때 ‘류(流)’ 자는 ‘흐를 류’ 또는 ‘달아날 류’라 한다. 그렇다면 풍류도 역시 ‘배달길’이 된다고 하겠다. 신라에서는 맨 처음 풍월주(風月主)라 하였다가 뒷날 화랑(花娘, 花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2) 광성자와 명유는 중국정사에서 상고의 신선으로 모셔지는 신비의 인물이다. 그리고 환인은 『환단고기』에서 ‘승유지기(乘遊至氣) 묘계자연(妙契自然)’ 하였다고 전하며, 환웅 역시 주문을 읽고 단을 복용하여 신령한 경지에 다다랐다고 한다. 단군임검 또한 삼국사기에 선인(仙人)왕검이라 칭하고 있다.
=== 선(仙)의 맥을 이은 인물들===============
신채호 선생은 『규원사화』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선(仙)이 한민족 고유의 것이며 이것이 일제치하 독립운동으로까지 이어지는 ‘낭가사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선인들은 한민족 건국과정에서 주체로 참여하였으며 국가의 위란 시마다 구국의 투혼을 보여왔다. 배달국의 제세핵랑군에서 시작된 선인의 맥은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사도, 신라의 화랑, 고려의 국자랑으로 이어지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끝으로 은둔의 길을 걷게 된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김유신, 우륵, 의상대사, 원효대사, 강감찬, 김시습, 정북창, 이지함, 곽재우, 권극중 등 낯익은 이름들이 선인의 맥을 이은 인물들이다. 이외에도 무명으로 시해선(尸解仙)이나 천선(天仙)이 된 이들은 수없이 많다. 이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풍류로써 자연과 벗하다가도 국가의 위난 시나 대변국기에는 어김없이 세상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함을 꺼리지 않았다.
최치원 역시도 「낭혜화상비문」에서 장생을 구하여 학을 타고 날아다니며 고고함을 구하는 중국 선도를 깎아 내리며, 오히려 중생을 구제하여 세상을 위해 몸을 적시는 진정한 선의 길을 제시하였다.
<참고자료>
『삼국사기』권46(열전 제6) 최치원
「최치원의 삼교융화사상에 관한 연구」, 하갑룡, 부산대학교
「고운 최치원 시집1」, 김진영 외역, 민속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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