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성세를 연 범안간쟁(주1)의 화신, 위징魏徵
*상제님께서 좌정하신 후에 백관에게 명하시기를 “위징(魏徵)을 데려오라.” 하시고 대령한 위징을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너는 무슨 일로 두 마음을 품고 낮에는 당태종을 섬기고 밤에는 옥황상제를 섬겼느냐?” 하시니 위징이 크게 사죄하는지라.
(도전 2편 39장 6~7절)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우주변화원리에 따라 개인은 생장소멸하고, 국가는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그래서 역사에는 영원한 제국은 없다. 늘 통일되었다 다시 분열되고 다시 통일되는 과정을 거친다. 후한 말기 황건기의黃巾起義로 시작된 위촉오의 삼국시절은 사마씨의 서진西晉제국으로 혼란이 종식되는 듯 했다. 하지만 서진은 허무하게도 단명했다(280년 삼국통일한 해~317년 동진이 건립되는 해까지 38년). 물론 단명으로 끝난 진秦제국과 수隋 제국을 언급할 수 있으나, 이 두 제국은 뒤를 이은 한漢과 당唐에 정치, 군사, 사회, 경제, 문화 등이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서진은 그런 게 없었다. 서진 패망 후 한, 당과 같은 통일제국이 들어서지 못하고, 오히려 삼국시절보다 더 한 혼란기가 3백년이나 이어졌다. 서진의 등장 자체가 거대한 난세의 휴지기이자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 서진은 황실을 비롯한 권력층들이 나약하고 부패하고 사치풍조가 만연하였고, 주지육림을 위해 일반 백성들에 대해 가해진 무자비한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해졌다. 서진 멸망의 전주곡 ‘팔왕八王의 난’은 바로 사마씨 황족 스스로 보위를 둘러싸고 벌인 이전투구이자 자멸의 난투극이었다. 서진의 지배층들은 이를 저지하려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다스림) 전략을 구사하지만,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흉노匈奴와 흉노의 별종인 갈羯,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동호 즉 퉁구스계에 속하는 선비鮮卑, 티베트계인 저氐와 강羌 등의 5호가 북중국에서 잇달아 정권을 수립하며 명멸해 갔다. 이른바 5호 16국, 위진남북조 시대였다.
서진남북조 시대는 삼국시대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삼국시대는 한족漢族이 중심이 되었다면, 서진남북조 시대는 호인胡人(한족 이외의 북방민족들을 오랑캐라 지칭하며 부르던 말)들이 중심이 되어 각축을 벌였다는 차이점은 있다. 이 시기는 한족의 관점에서는 역사상 가장 고통스럽고 어두운 시기로 보지만, 북방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위대한 영웅들이 활약한 시기에 해당하고, 이 때 동쪽 하늘의 지배자는 고구려였고, 동쪽 바다의 패자는 백제였다.
중국의 역사는 결코 한漢족의 역사로만 이뤄져 있지 않았다.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북방의 호인胡人을 중심으로 한 비非한족의 왕조 역사가 훨씬 길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여러 나라가 난립하긴 했으나 줄곧 호인이 세운 북조가 중심축을 이루었다. 수隋, 당唐 제국을 세운 이들 역시 선비족 출신이 중심이 된 호한胡漢 융합 정권이었다. 이후 중국의 역사는 이 호인胡人들이 청대 말기까지 역사의 중심축으로 작용했다. 통일 시대인 원제국과 청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분열시대에 등장하는 요遼, 금金, 북원北元, 후금後金 모두 무력 면에서는 한족 정권인 송宋, 명明을 압도했다.
서진 남북조 시대는 북방민족의 참신한 문화와 상무 정신이 유입되어 문학과 음악, 회화, 서법, 그리고 불교, 도교, 유교, 법가, 명가, 종횡가 등 수많은 사상이 각축을 벌이며 흡사 제2의 전국시대를 연상케 하였다. 이때 이루어진 사상과 제도를 토대로 천하를 운영했는데, 위魏무제 조조曹操의 둔전제와 인사 등용방식인 구품중정제, 그리고 서진남북조 시대의 부병제와 균전제, 과거제는 이후 약간의 손질은 있었으나, 그 골격은 청淸제국 멸망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고,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주었다.
581년 북주北周의 열두 대장군 중 한 명인 외척 양견楊堅이 외손자인 정제靜帝 우문천을 압박해 보위를 넘겨받고 수隋나라를 세운다. 하지만 그는 아들 양광楊廣에게 피살당했고, 뒤를 이은 수양제(양광)는 대운하와 이궁 건설 등 과중한 토목공사를 추진했고 세 차례에 걸쳐 무리하게 고구려를 침공하다 대패하는 등의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이밀, 왕세충 등 군웅들이 명멸한 짧은 혼란기를 거쳐 천하는 천책상장(주2) 이세민李世民과 그를 보좌한 24장이 이끄는 당唐나라에 의해 재통일이 되었다.
[서유기]에서 상제님의 명을 받는 위징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 한 번쯤 접해본 적이 있는 이름들을 들으면 우리는 그냥 허무맹랑한 소설이나 판타지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나오는 《서유기西遊記》는 당대 불교와 도교의 진수를 담고 있는 구도求道 이야기이다. 즉 삼장법사를 위시한 주인공들이 서천을 가는 과정 자체가 도를 구하는 모습이고 그들이 맞닥뜨리고 극복해 나가는 여든 한 개의 환란들은 도를 닦으면서 반드시 겪는 마魔의 형상화이다. 결국 그들이 서천에 들어가기 직전,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님(서유기에는 태을구고천존太乙救苦天尊으로 나온다. 90회 태을구고천존이 구령원성을 제압하다 편)의 도움으로 마지막 고난을 극복하게 된다. 서유기를 보면 바로 이 네 명이 서천으로 가게 되는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 당唐태종 시절인 정관 13년에 일어난다.
사건은 이렇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당 제국 수도 장안성 밖의 경하涇河용왕이 비를 내리라는 옥황상제의 명을 어기게 된다. 즉 비가 내리는 시간과 양을 줄였다. 이에 경하용왕은 천벌을 받아 참수를 당하게 된다. 바로 그를 참수할 사람이 당나라 승상이자 인조관人曹官(인간사를 담당하는 하늘의 직책) 위징魏徵이었다. 이에 경하용왕은 당태종에게 목숨을 구걸하게 되고, 이때 위징은 옥황상제님으로부터 교지를 받는다. 이를 서유기 본문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한편, 승상 위징은 관청에서 밤에 천문을 관측하고 귀한 향을 피웠지요. 들리는 것은 단지 하늘을 나는 학 울음소리뿐이었는데, 알고 보니 하늘의 관리가 사신으로 와서 옥황상제의 교지를 내리는 것이었어요. 그 내용은 낮 한 시 사십오 분에 경하의 용왕을 참수하라는 것이었어요. 위징은 옥황상제의 성은에 감사하고서 목욕재계를 했지요. 그리고 관청에서 검을 시험해보며 원기를 가다듬느라 조회에 참석하지 못했지요. - 서유기 1권 314쪽
이에 당태종 이세민은 위징과 바둑을 두며 그가 명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지만, 위징은 잠깐 조는 체하며 경하용왕의 목을 베어버린다. 이에 경하용왕은 자신의 억울함을 명부에 고발하고 당태종은 심문을 받기 위해 명부冥府에 끌려간다. 이때 위징은 당태종에게 편지를 써주어 저승에 있는 풍도판관 최각에게 전함으로써 다시 당태종을 이승에 돌아오게 했다. 최각은 명부에 있는 생명부에서 당태종의 수명을 10년 더 연장시켜주었다(당태종은 이후 10년 더 살다 고구려 침공의 후유증으로 정관 23년에 죽는다). 돌아오는 도중 저승의 이모저모를 돌아보며 느낀 바가 많았던 당태종은 수륙대회水陸大會를 열어 저승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을 구제하고 법회에 현신한 관음보살에게 감화되어 삼장법사를 서천으로 파견해 불경을 가져오게 한다. 여기에서부터 서유기의 긴 여행길이 시작된다.
이처럼 위징은 당태종을 섬기는 승상의 직에 있으면서도 옥황상제님의 명을 받드는 일도 수행한 인물로 역사상 태평성세로 알려진 정관의 치를 연 명신名臣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그의 면모는 어떠했을까?
정관성세를 연 정치가, 위징
人生感意氣(인생감의기) 인생이란 (다른 이, 천자의) 의기에 감동하는 것이니
功名誰復論(공명수부론) 누가 또다시 공명을 논하리오
이 시는 위징이 지었다는 <술회述懷>라는 시의 구절이다. 자신이 모시던 주군과 반대되는 세력의 수장이었던 당태종, 그의 의기에 감동하고 그를 추종하여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을 바쳐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루었던 위징은 자字가 현성玄成으로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에 속하는 거록巨鹿 곡성曲城에서 북주北周 정제靜帝 대상大象 2년(580)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천하가 대란에 처해 있었다. 그의 부친인 위장현은 북제에서 둔류현 현령을 지낸 박학다식한 인물이었으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고아가 된 위징은 빈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가슴속에 언젠가 큰일을 이루고 말겠다는 웅대한 뜻을 품고 각고의 노력으로 독서에 힘쓰고 학문, 특히 전국시대 종횡가의 학설에 뜻을 둠과 함께 정치적 재능의 기초를 닦았다. 도량이 컸고 이후 도교를 신봉해 도사道士가 되기도 했다.
수나라 말기 각지에서 영웅호걸들이 분분히 기병하였다. 위징은 처음에는 원보장元寶藏의 기의군에 참여하였다가 그의 사람됨을 잘 아는 이밀李密의 호출로 그의 막하에 들어가 군중의 문서를 관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이밀은 위징을 기재機才로 생각했으나 크게 등용하지는 않았다.
이후 이밀은 수양제가 파견한 왕세충에게 패하면서 당고조 이연李淵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는데, 위징도 이밀을 따라 당唐 왕조에 귀순하였다. 당의 신하가 된 위징은 전에 섬기던 주인인 이밀의 장례를 군주에 예에 맞게 치러주고 제문을 지어 그의 공적과 인품을 해하에서 패한 항우에 비유하였다. 문책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한 이런 그의 충심에 사람들은 모두 칭송을 하였고, 그가 이밀을 배반하고 이연에게 투항한 것이 아님을 인정하였다. 나중에 위징은 기의군의 수령이었던 두건덕에게 포로로 잡혀서 그의 권유와 협박에 못 이겨 1년 반 동안 그의 군중에 있다가, 두건덕과 왕세충이 전부 이연의 차남 이세민李世民에게 패하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또다시 이연에게 귀의했다(이때 두건덕과 왕세충을 정벌한 공으로 이세민은 천책상장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다 621년 당고조 무덕 4년, 혹자들은 위징이 여러 번 주인을 바꿨다고 오해할 수 있으나 위징은 스스로 지조를 바꾼 것이 아니고 주인들이 다른 이에게 패망하거나 투항하였기에 그 휘하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 태자 이건성은 위징이 유능하고 인품을 갖춘 인물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등용하여 도서와 경적을 관리하는 세마洗馬라는 작은 관직을 주었다. 이 시기 위징은 약간의 명성은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후 당이 천하의 대세를 장악하자, 이연의 차남 이세민의 공적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당고조 이연의 장남 태자 이건성은 4남인 제왕齊王 이원길과 연합하여 이세민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며, 위징도 태자에게 매번 이세민을 도모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던 무덕武德 9년(626년) 7월 2일 이세민은 당의 궁궐인 태극궁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에서 형과 아우를 죽이는 이른바 ‘현무문의 변’을 일으켰다. 이후 당고조의 양위를 받으니, 청나라 강희제와 함께 가장 뛰어난 제왕 리더십을 보여준 선비족 출신 당태종이 바로 그다.
당태종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태자 세력을 제거할 때 위징을 불러 말했다.
“그대가 우리 형제를 이간시킨 것은 무엇 때문인가?” 워낙 교언영색을 모르는 위징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사람에겐 누구나 주인이 있기 마련이지요. 황태자께서 제 말을 들으셨다면 틀림없이 오늘의 화는 없었을 것이오.” 당태종은 평소에 그를 그릇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벌하지 않고 첨사주부로 임명하고 황제로 등극한 후에는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발탁하였다. 간의대부는 전문적으로 황제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직책으로 명목상으로는 아무런 권한은 없지만, 황제의 신임에 따라 막강한 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위였다. 이는 당태종이 위징의 능력을 인정함과 함께 그의 올바른 됨됨이 자체를 존중하고 신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의 만남이었다. 위징의 명성은 신하의 의견에 겸허하고 소박한 태도로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태종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또한 당태종의 정관성세는 천자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직언을 서슴지 않는 신하 위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태종과 신하들의 문답이 담긴 『정관정요』에는 유명한 위징의 ‘양신론良臣論’이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위징이 말한다. “신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까닭에 시종 바른길로 가며 일을 해왔습니다. 어떤 거짓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으로 하여금 양신良臣이 되게 하시고, 충신忠臣이 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태종이 물었다. “양신과 충신의 차이점이 무엇이오?”
위징이 대답했다. “양신良臣은 스스로 미명美名을 얻고 군왕이 숭고한 칭호를 누리게 합니다. 자손 대대로 전해져 부귀영화가 끝이 없습니다. 충신忠臣은 자신의 몸이 주살되고 군왕은 큰 악명에 빠집니다. 집안과 나라 모두 큰 훼손을 입지만 오직 홀로 충신의 명예를 누리게 됩니다. 이로써 말하면 양신과 충신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관정요 권2 규간론規諫論)
정관 7년(633년) 위징은 시중侍中이 되었다. 당시 실무를 담당하는 상서성에 미처 해결이 안 되어 밀린 소송이 있었는데 태종은 조명을 내려 위징에게 처리하게 하였다. 위징은 법을 익혀서 적용한 게 아니라, 큰 줄기를 파악하고 사정에 따라 적절히 처결하였으므로 그에게 열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역사 편찬에도 참여하여 『수사隋史』의 서론을 짓고, 『양사梁史』, 『진사陳史』, 『제사齊史』에서는 총론을 썼다. 그래서 당시에 그를 훌륭한 역사가라는 의미로 양사良史라고 일컬었다. 사서 완성 후 좌광록대부左光綠大夫를 더하고, 정국공鄭國公으로 진봉되었다. 또한 그는 예법에도 밝아 『오례五禮』를 편찬하였는데, 오례는 국가에서 행하는 다섯 가지 의례로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를 말한다. 그와 함께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疏를 올려 태종이 자만에 빠질 것을 경계하였고, 제왕학 서적인 『군서치요群書治要』 편찬에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
세월이 지나 위징이 늙고 병으로 눕게 되자 태종은 거듭 사자를 보내 병세를 묻고 약을 보내주며 태자를 대동하여 직접 문병을 가기도 했다. 며칠 있다가 태종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위징이 살아있는 것 같더니 다음날 아침 위징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들었다. 당시 위징의 나이 64세(643년 정관 17년)였다. 위징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조정의 9품 이상 관리들에게 전부 조문하도록 지시하고 닷새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친히 비문을 써서 비석에 새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좌우 대신들에게 그를 그리워하는 말을 남기고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사람들은 의관을 바로 보기 위해 구리로 거울을 만들지만 옛 것을 거울로 삼으면 왕조의 교체를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정사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이제 위징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짐에겐 거울이 하나 없어진 셈이로구나!” 인감人鑑과 사감史鑑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 위징의 사후에 직간하는 이가 없게 된 당태종은 두 가지 실책을 저지르면서(자세한 것은 후술하는 ‘선비족 출신의 명군 이세민’ 내용 참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당나라가 일시 사라지는 파국을 맞이하기도 했다.
위징은 개인의 명리를 위해 황제와 조정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지 않고 위로는 군주를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한 가지 원칙으로 살았다. 그랬기에 그의 충성은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작은 충성’이 아니라 큰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큰 충성’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양신이 되고자 한 진정한 충신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제국 당나라의 정관성세를 연 선비족 출신의 명군 이세민
위징이 모셨던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은 북방민족인 선비족 출신이다(주3). [후한서]에는 선비와 오환을 모두 동호東胡, 즉 번조선의 후예라고 했다. [위서]에서는 선비족의 발상지를 대선비산大鮮卑山(대흥안령 일대)으로 산 이름에서 족명을 취했다고 한다. 북흉노가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이동해 흉노의 본거지인 몽골 고원이 일시적인 공백지대가 되자 패권을 다투던 여러 족속 중 선비족이 패권을 잡았다. 이후 같은 계통인 오환족이 위나라 조조의 공격으로 부족연맹이 해체 되었고(207년, 조조의 북벌), 중원의 서진 제국이 붕괴되어 혼란에 빠지자 선비족은 대거 남하하였다. 그 족속 중 일파인 탁발부가 세운 북위(그들은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생각했기에 국호를 위魏로 했다)가 북중국을 통일했을 당시 선비족은 장안이 속하는 관중 일대로 대거 이주했다. 이후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는 과정에서 장안을 근거지로 삼은 우문태가 서위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수문제 양견을 위시한 무장들이 조정의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선비족의 군사조직을 흉내 낸 부병제를 실시하였다. 이는 당시 처음으로 실시된 균전제(모든 토지가 조정의 소유라는 전제하에서 출발하여 노예를 포함한 모든 농민들이 각각 그들의 경작 능력에 따라 일정량의 토지를 분배받았다)에 의해 파악한 장정을 군사력으로 활용하기 위한 징병제도로 부병제로 이는 수당 제국의 핵심적인 통치제도로 정착되었다.
당태종은 수나라 개황 19년인 599년 1월 23일 당국공 이연李淵과 두태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민이란 이름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으로 뛰어난 장수이자 정치가 전략가 서예가였다. 614년 역시 선비족 출신인 현명한 황후인 문덕황후 장손 씨와 혼인을 올렸다. 대업 13년인 617년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수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이연의 차남인 이세민은 천하를 편안하게 다스리려는 큰 뜻을 품고 우유부단한 아버지인 이연을 설득해 마침내 기의하였다. 이후 장안을 점령하고 여러 호적수들을 제압하여 당제국 성립에 큰 공을 세웠다. 통일의 대업이 끝나자 현무문의 변을 일으킨 후 드디어 장안 황성 안의 현덕전에서 대당제국 제 2대 황제에 올랐다. 연호는 정관貞觀. 현무문의 변에서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위징을 비롯한 여러 인재들을 포용함으로써 개국 초기의 혼란을 잠재운 당태종은 뛰어난 인재 경영으로 정관의 성세를 이루어 냈다.
이세민은 위징의 의견을 받아들어 부국강병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와 함께 뛰어난 인재를 곁에 두고 수시로 조언을 들으며 이를 정책에 반영하여 군신이 함께 지혜를 모아 치국평천하에 임하는 자세를 중시한 이른바 천하위공을 펼쳤다. 그의 치세 때는 예악과 인의 충서 중용 등의 유가가 강조하는 덕치가 꽃을 피웠다. 그의 치세에는 유교와 불교 도교 등 삼교가 정립하는 형세로 사상적인 자유와 그 내용이 풍성해졌다. 통치제도인 3성6부제와 인사제도인 과거제는 동아시아의 기본적인 통치체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듯 뛰어난 당태종도 현후賢后인 장손황후(정관 10년 636년 36세)와 위징(정관 17년 643년)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승리의 단물에 빠져 오만함을 드러냈다. 그의 치세에 최대의 오점을 내는 사건이 터졌다. 하나는 사치와 방종에 빠지면서 황태자인 승건을 폐하면서 나약한 치治(훗날의 고종)를 태자로 삼은 일이다. 고종 사후 그의 부인인 측천무후는 일시적으로 당나라를 주나라로 바꾸면서 당의 중쇠中衰를 야기했다. 또 하나는 정변政變을 일으켜 영류제를 쫓아낸 연개소문의 죄를 꾸짖으며 고구려를 침공한 일이다(정관 18년인 645년). 고구려를 침공한 당은 초기에는 승세를 잡는 듯 했지만 대막리지 연개소문과 안시성주 양만춘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고구려에 패하였다. 특히나 안시성(최근 연구 결과 해성海城시에 있는 영성자 산성을 안시성으로 지목하고 있다) 전투에서 당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으면서 패퇴하고 만다.(주4) 『환단고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이때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패퇴하는 당태종을 추격하여 그에게 항복을 받고 장안에 입성했다고 한다. 이에 산시 성. 허베이 성. 산둥 성 등지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당태종은 “위징이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나한테 이런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위징약재魏徵若在 불사아유시행야不使我有是行也)”이라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후 안시성에서 얻은 병으로 정관 23년인 649년 5월에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8월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예천현 동북쪽 90리 밖의 구종산九嵕山에 있는 소릉昭陵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문황제文皇帝이고,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위징 사후에 비록 오점은 있었지만 당태종은 인재경영과 함께 직언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항상 민생을 배려하는 명군임은 틀림없다.
능연각 24공신화상과 24절기
*성도들에게 24절을 읽히시며 “그 때도 이때와 같아 천지에서 혼란한 시국을 바로잡으려고 당 태종唐太宗을 내고 다시 24절에 응하여 24장을 내어 천하를 평정하였나니 너희들도 장차 그들에 못지않은 대접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도전 5편 399장 5~6장)
이십사장二十四將은 태원太原에서 군사를 일으킨 당국공 이연을 도와 당唐 왕조 건국에 일조하고, 현무문의 변에서 진왕秦王 이세민을 도와 그가 황제로 등극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당태종의 정관성세를 연 24명의 공신을 말한다. 정관 17년인 643년 당태종은 이들을 표창하게 위해 장안에 있는 능연각凌煙閣에 당대 최고의 화가인 염립본閻立本(?~673)에게 이들의 초상을 그리게 한 것에서 유래한다. 문헌에서는 이들을 ‘훈신이십사인勳臣二十四人’, ‘능연각공신 이십사인凌煙閣功臣 二十四人’이라고 통칭한다. 24인의 공신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위징을 비롯해서 장손무기, 방현령, 두여회, 진숙보 등이 있다.
이십사장의 수장인 장손무기長孫無忌는 북위의 황족인 탁발씨 후손으로 수나라 우효위장군 장손성의 아들로, 이세민의 황후인 장손황후의 오빠이기도 했다. 그는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매제인 이세민을 보필하여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정관10년(636) 여동생 장손황후가 죽으면서 오빠를 중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지만 이세민은 이를 좆지 않았다. 위징 사후 승상 겸 태위가 된 그는 이세민과 함께 고구려 침공에 나섰으나 대패하였고, 이후 당고종 이치李治가 측천무후가 되는 당태종의 후궁 무씨를 황후로 맞아들일 때 반대하다가 작위를 박탈당하고 귀주로 유배를 가서 자결하고 만다.
방현령房玄齡은 18세 때 수나라에서 실시한 진사시험에 급제한 인재였다. 이세민의 장자방으로 불린 그는 현무문의 변을 실질적으로 기획한 인물로 주요 보직을 역임하며 이세민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 사람들이 그를 두고 후한 광무제 때 명신 등우에 비유하기도 했다.
두여회杜如晦는 대대로 북조와 수나라에서 벼슬을 한 관료 집안 출신으로 수나라 때 현위 벼슬을 한 후 초야에 묻혀 지내다가 이세민 휘하로 들어갔다. 이후 문학관 십팔학사의 일원이 되었다. 머리는 비록 방현령에 미치지 못했으나 결단력이 뛰어났다.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공평한 태도로 일관한 까닭에 위징과 더불어 현상賢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진숙보秦叔寶는 지금의 산둥 성 제남시인 제주 역성 출신으로 용맹스럽고 절개가 굳었던 인물이다. 매번 선봉에 서서 용맹함을 드러냈다. 당고조 이연은 진숙보를 일컬어 처자식을 돌보지 않고 와서 공을 세운 인물로 자신의 살을 베어서 진숙보에게 내려주어도 좋을 만큼 그의 공을 인정했다.
그 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있다. 우세남虞世南은 수양제를 받들었으나 중용되지는 못했다. 왕희지의 서법을 익힌 그는 구양순, 저수량과 함께 당나라 초기 서예의 3대가로 일컬어지며, 해서楷書에서는 일인자로 칭송받고 있다. 이(세)적李(世)勣은 돌궐 격파의 공이 있으며 고구려 침공에 종군했다. 결국 당고종 때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하는 공을 세웠다. 울지경덕尉遲敬德은 각종 전투에 참여해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으며, 현무문의 변에 참여했다. 이정李靖은 파촉 공략에 공을 세웠으며 당태종과 역대 병법을 논한 [당리문대唐李問對(이위공 병법)]는 송나라 이래 무경 칠서의 하나로 선정돼 무인들의 필독서가 됐다. 굴돌통屈突通은 수나라 장수였다가 포로가 되어 귀순해 전공을 세웠다. 후군집侯君集은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토욕혼 토벌에 공을 세웠다. 소우蕭瑀는 남주 양나라 황실 후손으로 사리판단과 인화에 뛰어나 재상을 지냈다. 고사렴高士廉은 명민한 데다 기억력이 좋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24공신은 24절기라는 시간적인 개념과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후한 광무제를 도운 28장이 28방위라는 공간적인 개념과 상관관계를 갖는 것에 대응된다. 24절기는 ‘이십사절후 二十四節侯’, ‘이십사기二十四氣’, ‘이십사절二十四節’이라고도 하며 이는 우리의 모든 생활방식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즉 이십사절기는 기후 변화와 농사철을 알려주어 농업생산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절기節氣는 1년을 스물네 마디의 기후로 나눈 것으로 태양의 황경黃經에 따라 24등분한 기후의 표준점이다. 황경은 태양이 춘분점을 지나는 점을 기준으로 해서 황도(지구에서 보았을 때 태양이 1년 동안 하늘을 한 바퀴 도는 길)에 따라 움직인 각도를 말한다. 이 황경을 15도를 간격으로 해서 0도일 때를 춘분, 15도일 때를 청명이라고 하는 식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동지, 소한, 대한, 입춘 하는 바로 그 절기이다. 절기는 우주의 기운이 배치된 지도와 같아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운과 기에 관여한다.
24절기의 구분은 계절과 기후 그리고 물후物候(만물의 기후 변화에 대한 반응) 등 자연현상의 변화를 충분히 고려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통상 이십사절기의 처음을 입춘으로 삼는데, 이 입춘立春을 관장하는 인물이 바로 위징이다. 입춘은 대개 정월에 있기 때문에 입춘 자체가 새해를 상징하기도 해서 입춘대길立春大吉 같은 입춘첩을 대문이나 대들보, 기둥에 붙인다.
주1.
범안간쟁犯顔諫箏이란 임금에게 고분고분하게 대하지만 않고, 군주의 얼굴색이 달라질 만큼 적극성을 가지고 바른 말을 하여 간한다는 뜻이다.
주2.
‘천책상장天策上將’은 하늘이 내린 장수, 즉 하늘을 꿰뚫을만한 계책을 가진 상승 장군이란 의미이다. 당나라가 수를 계승한 정통왕조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수많은 세력을 진압하는 데 공이 큰 이세민李世民에게 당고조 이연李淵이 내린 칭호로, 이세민을 진왕秦王 겸 상서성의 장관인 상서령으로 정하면서 모든 왕들의 상위에 위치한 자라는 의미로 정해 주었다. ‘천책’에는 부열성傅說星, 즉 상나라 탕왕을 보좌한 재상 부열과 같은 공명이라는 의미가 있다. 부열성은 부열이 죽은 뒤 하늘에 올라 되었다는 별로 어머니들이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동방 7수 중 하나인 미수尾宿 근처에 있다.
주3.
원래 흉노를 비롯한 북방민족에게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습이 있었다. 이른바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인데 이는 우리의 고구려나 백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태종 이세민이 선비족임을 이해한다면 그가 제수인 이원길의 비인 양씨를 후궁으로 삼은 일이나, 그의 아들인 고종 이치가 당태종의 후궁인 무측천을 황후로 삼은 것도 이해가 된다. 훗날의 일이지만 측천무후의 손자인 현종玄宗 이융기가 자신의 열여덟 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李瑁의 비인 양옥환을 취해 귀비(안사의 난을 촉발시킨 양귀비楊貴妃)로 삼은 일도 이해가 될 수 있다. 더불어 당태종이 돌궐을 정벌한 후 받은 천가한天可汗이란 칭호에 그게 왜 그렇게 기뻐했는지도 이해된다. 수당의 지배층들이 번조선의 후예인 선비족 출신이었기에 천하를 통일하면서 나라의 명운을 걸고 굳이 고구려를 침공한 이유가 단군조선의 정통이 고구려인지, 아니면 자신들인지를 가리기 위한 무리수가 아닌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주4.
이에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것을 중국의 역사에서 참고해 보면, 당태종의 병에 관한 진단은 (甲) <구당서>의 태종본기,(乙)<신당서>, (丙)<자치통감> 등에서 서로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갑은 당태종이 내종(內腫:암)으로 죽었다고 하였으며, 을은 당태종이 한질(寒疾:감기)로 죽었다고 하였으며, 병은 당태종이 이질로 죽었다고 하였다. 한 세대 동안 전 중국에 군림하여 호령하였던 만승의 황제가 죽은 병 이름이 늑막염인지 장티푸스인지 모르게 애매모호하게 기록한 것은 대개 고구려인의 화살 독에 죽은 치욕을 감추려다가 이 같은 모순된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요동에서 얻은 병이라고 한 것은 모든 기록들이 동일하니, 양만춘이 쏜 화살에 맞아 그 유독遺毒으로 죽은 것이 명백하다.”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 (대원출판, 2003)
『역주 환단고기』 (안경전, 상생출판, 2012)
『증산도의 진리』 (안경전, 상생출판, 2014)
『정관정요』 (오긍 지음·신동준 역, 을유문화사, 2013)
『당태종과 이십사장』 (이재석, 상생출판, 2010)
『서유기』 (오승은 지음·서울대학교 서유기번역연구회 옮김, 솔, 2004)
『영웅의 역사 7- 대제국의 황제 당태종』 (마루야마 마츠유키·윤소영 역, 솔, 2000)
『삼국지 다음이야기』 (신동준, 을유문화사, 2014)
『변경』 (렁청진 편저·김태성 역, 더난출판, 2003)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
『역사스페셜 6- 전술과 전략 그리고 전쟁, 베일을 벗다』 (KBS 역사스페셜, 효형출판, 2003)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대사공을 지낸 왕량 장군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정관의 치라 불리우는 위징과 당태종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민족사학을 바로 세운 미수 허목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왜 주회암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하셨는가?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모든 창생들이 신선되길 바랬던 여동빈 呂洞賓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천하경륜의 대도를 세워 만세에 은덕을 베푼 강태공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최익현의 일심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우암 송시열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후한 광무제(光武帝)를 도와 난세를 바로잡은 경감장군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범절을 확립한 유가의 창시자 공자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동방 단가문자를 집대성한 권극중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우주의 시간법칙을 밝힌 소강절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유불선의 뿌리, 신교를 밝힌 고운 최치원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광무제와 28장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최풍헌과 임진왜란에 얽힌 이야기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소하의 덕과 '언덕(言德)’의 진정한 의미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안될 일을 되게 한 손빈의 지략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배은망덕으로 나라를 그르친 대죄인, 안록산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만고명장 전명숙全明淑의 큰 공덕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불운한 천재 구봉 송익필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입산 3일에 천하의 모든 일을 알게 된 정북창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가을우주의 이치를 밝힌 '정역正易'과 김일부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중국의 실질적 마지막 황제, 광서제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을 가장 먼저 모신 백복남 성도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지상과 천상에서 무한한 공덕을 쌓은 이마두利瑪竇대성사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관운장의 정의로운 삶과 운장주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인류문명의 새벽을 연 한민족의 시조, 태호복희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상제님의 강세를 전한 죄수운 대성사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미륵불 강세한 준비한 진표율사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성인열전]-의로움의 상징 관운장(關雲長)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천하를 경영한 인물의 표상 강태공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동서양 문화를 하나로 연 위대한 종교인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조선의 주자(朱子)가 되기를 꿈꾼, 우암 송시열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상제님의 강세와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린 최수운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선교의 맥을 이은 장군 강감찬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미륵님을 세상에 전한 진표眞表대성사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선농단에서 경농의 신, 신농씨를 만나다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독립의사 안중근(安重根)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대를 잇는 개척開拓과 창업創業 주周 문왕과 무왕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용인술의 천재 유 씨네 막둥이의 득천하기得天下記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삼국시절이 돌아갈 곳을 안 한 사람, 사마소司馬昭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정관성세를 연 범안간쟁(주1)의 화신, 위징魏徵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구도인의 표상 진표眞表의 미륵불 친견기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신유학을 완성한 진정한 스승, 주회암朱晦庵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후천선경 건설의 대문명신大文明神 진묵대사震默大師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후천 지상선경 건설의 주벽 절대신앙의 화신 마테오 리치 대성사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비운의 천재 용호대사 정북창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격랑 속의 초인, 대한남아의 기개를 떨친 안중근安重根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시천주侍天主 시대를 연 동학東學 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백성을 위해 한번 죽기로 맹세한 백의한사 전명숙(주1), 만고명장이 되다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진 비운의 천재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황혼의 제국에 드리워진 빛의 실마리 청나라 광서제光緖帝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대한제국 고종 광무제高宗(1)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 대한제국 고종 광무제高宗(2)
'증산도 도전(道典) > [도전 탐구] 도전 속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운의 천재 용호대사 정북창 (0) | 2016.01.26 |
---|---|
후천 지상선경 건설의 주벽 절대신앙의 화신 마테오 리치 대성사 (0) | 2015.11.23 |
후천선경 건설의 대문명신大文明神 진묵대사震默大師 (0) | 2015.09.06 |
신유학을 완성한 진정한 스승, 주회암朱晦庵 (0) | 2015.07.10 |
구도인의 표상 진표眞表의 미륵불 친견기 (0) | 2015.07.10 |
삼국시절이 돌아갈 곳을 안 한 사람, 사마소司馬昭 (0) | 2015.06.02 |
용인술의 천재 유 씨네 막둥이의 득천하기得天下記 (0) | 2015.04.02 |
대를 잇는 개척開拓과 창업創業 주周 문왕과 무왕 (0) | 2015.02.09 |
독립의사 안중근(安重根) (0) | 2014.11.17 |
선농단에서 경농의 신, 신농씨을 만나다 (0) | 2014.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