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께서 9년 천지공사(1901∼1909년)를 보신 후 100여년 동안 한민족의 생활 가운데 가장 큰 변화를 말하자면, 의식주 생활에서의 격변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머리모양의 변화는 민족전통의 생활철학을 뒤흔드는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조선정부가 근대화와 개화를 도모하면서 맨먼저 시도한 일은 단발령이었다. 조선왕조의 왕비를 살해하고 나라마저 집어삼키려던 일본의 압력에 의해 강제시행된 단발령(斷髮令)은 대다수 국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면서 몇차례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전국적으로 시행된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상툿고에 동곳을 찌른 채 자른 상투를
호연이 있는 사랑방으로 들고 들어오시니…[중략]… 호연이
“아이구 참말로, 요상하게 왜 상투를 그렇게 끊었어요?” 하고 말하니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그냥 머리카락이라고 생긴 것은 다 끊어야.”하시니라.
호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사람들은 다 저러고 있구만, 뭘.”하고 말하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끊으면 시나브로 다 끊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5:14:1∼7)
상투의 철학
상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족 고유의 풍속이다. 또 상투는 결혼의 상징이었다. 상투가 없는 조선인은 비록 성인일지라도 미성년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취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찢어지게 가난해도 상투와 망건, 갓, 도포 일체를 살 수 있는 돈을 힘들여 모으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투는 기혼과 미혼, 신분의 지위고하 등을 표현하는 사회적 표현물이기도 했다.
단발령의 풍랑이 온 나라를 헤집어
조선조 500년간 유교문화에 길들여졌던 유생들에게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신체와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훼손하지 않음이 효의 시작이다)한 가르침에 따른 예법을 버리라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실제로 많은 선비들이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는 없다’‘목은 잘려도 머리칼(두발)은 자를 수 없다’고 분개하였으며, 자결한 이도 적지 않았다.
단발령은 수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나라의 기틀을 뽑아버리고, 정체성을 파괴하는 일로 받아들여졌기에, 그 충격은 무섭게 번져나갔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군부대신인 조희연 등이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한 후 머리를 깎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고 선언하며 왕을 위협하여 머리를 깎도록 강요했으며, 농상공부대신 정병하가 황제의 머리를 깎고 유길준은 황태자의 머리를 깎았다 했다.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이 이미 내려지니 백성들은 이를 인륜을 파괴하는 패륜이자 신체에 대한 심각한 박해로 받아들이고 반일감정이 충천해갔다.
조선왕조의 문화적 기틀을 뽑아버린 단발령
당시 도성에는 연일 곡성이 하늘을 진동했고, 지방에서도 머리 자르는 벼슬을 급조하여 사람을 찾아다니며 수색하느라 법석을 떨어 시장은 철시했으며 유통이 멎어 생계가 위협받을 지경이었다 한다.
단발령 이전까지 우리나라 남성의 전형적인 헤어스타일은 상투머리 아니면 떠꺼머리였다. 혼인한 사람은 상투를 틀어 올렸고, 결혼하기 전에는 길게 땋아내린 각(角)머리를 말총으로 묶었다. 그래서 ‘총각’은 결혼 전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증산도 도전』에 의하면, 증산 상제님은 1902년 상투 자르고 머리 깍는 개화공사를 처음으로 보셨다.
“내가 끊으면 시나브로 다 끊느니라.”(道典 5:14:7)
“이제 죄다 깎어, 다 깎어. 형렬이도 깎아야 한다.”(道典 5:15:4)
또 “그놈들이 달려들어 끊기 전에 우리가 우리 손으로 끊어야 수치를 면하리라. 이제 너나없이 다 끊을 것인즉 애석하게 여기지 말고 끊으라.”(道典 5:16:2)하시니 이에 상투를 잡고 우는 김형렬과 함께 우시는 장면이 나온다.
1902년은 군부,경무청 소속의 군인,경찰,관원 등을 대상으로 재차 단발 명령이 내려진 해이다. 그러다가 1904년에 이르러 각부 관리들에게 단발 및 양복을 입도록 지령이 내려졌는데, 이때부터 일진회가 단발에 흑의(黑衣)를 입는 대혁신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상제님께서는 1905년에도 단발을 여러 모양으로 변형하신 머리모양 공사(道典 5:72)를 보신 적이 있고, 마지막으로는 1907년에 “내가 장차 머리를 깎으리니 너희들도 모두 머리를 깎으라”(道典 5:131:2)하시고 “단발(斷髮)한 것이 보기에 좋으니라”(道典 5:131:6)하시어 천지가 단발 세상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는 일찍이 증산 상제님께서 새 천지를 개벽하시는 대공사를 행하시며 “모든 것이 나로부터 다시 새롭게 된다”(1900신축년, 道典 1:32:3) 하시고 “앞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신분과 직업의 귀천이 없어 천하는 대동세계가 된다”(道典 4:33:1∼10)하신 말씀의 실현과정이리라.
원래 서울에 최초로 사진관이 선을 보인 것은 1883년경이었다. 당시 몇몇 개업장이 장안의 명물로 등장했지만, 민중들의 무관심과 좋지 않은 소문 때문에 고객의 발길이 뜸했다 한다.
그러나 단발령이 강행되자 제일 먼저 빛을 본 것은 사진관이었다. 조상님이 물려주신 자신의 신체 모습 그대로를 영구히 보존해두기 위해 사진관이 성황을 이루었다 한다.
서양에서도 남성의 짧게 깎은 헤어스타일이 보편화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다. 프랑스의 기계 제조회사인 ‘바리캉 에 마르’(Bariquand et Marre)가 만들어낸 이발기(일명 바리캉)는 짧게 깎은 단정한 머리스타일을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참고자료
아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백년전 한국의 모든 것), 도서출판 살림, 2001년
황현, 『매천야록』, 허경진 역, 한양출판, 1995년
이규태, ‘역사에세이-100년의 뒤안길에서’, 조선일보 1999년 4월 23일자
김남용, ‘단발, 헤어스타일의 어제와 오늘’, 《월간 개벽》2000년 6월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6권/제11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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