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년 파라오의 나라 이집트
이집트는 나일강의 고대문명을 이룩한 아랍의 대국이다. 오랫동안 파라오 중심의 화려한 문명을 구가하여 왔으나, 그리스 로마와 이슬람 등 약 2300년간에 걸친 이민족의 지배를 거친 끝에 근대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2010년말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불어닥친 아랍의 봄 재스민혁명의 여파로 이집트는 많은 내홍을 겪고 있으며 현재는 군부가 주도하는 과도정부로 운영되고 있다. 5000년의 세계적 문명을 자랑하는 이집트 역사의 명암을 살펴보기로 한다.
역사와 영토환경
영토와 자연환경
이집트는 세계에서 30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중앙아메리카 전역과 비슷한 넓이이며, 스페인의 두 배, 영국의 네 배, 대한민국의 약 열 배 정도의 크기이다. 그렇지만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인구는 좁은 나일강 계곡과 삼각주에 집중되어 있다. 즉, 아프리카 북동부 구석의 거대한 사각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이집트 국토의 99%이상이 불모의 사막지대이므로, 인구의 99%가 전 국토의 3%에 해당되는 지역인 비옥한 나일강 계곡과 나일강 삼각주에 밀집해 있다.
이집트 국경은 서쪽으로 리비아, 남쪽으로 수단, 북쪽으로 지중해, 동쪽으로 홍해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수에즈운하의 동쪽 지역은 시나이 반도로, 캐서린 산(2642m)과 시나이 산을 비롯한 산맥으로 비탈진 지역이다. 카이로 북쪽에서 나일강Nile river은 수많은 지류로 갈라져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숭배하던 동물 대부분(표범, 치타, 오릭스 영양, 하이에나 등)은 오늘날 이집트에서는 멸종되었다. 현재는 길들여진 낙타와 당나귀가 이집트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동물이다.
이집트 날씨는 연중 대부분 덥고 건조하다. 12월, 1월, 2월의 겨울동안 일일 평균 기온은 지중해 연안에서는 섭씨 20도 정도, 아스완Aswan에서는 섭씨 26도 정도이다. 겨울밤에는 섭씨 8도까지 내려가는데 이집트 기준에서는 아주 추운 날씨라 할 수 있으며, 알렉산드리아는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지역으로 1년에 190mm정도 내리고, 아스완은 연 강수량이 2mm로 거의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이다. 3월에서 4월에는 서부 사막으로부터 캠신khamsin 열풍이 시간당 150km까지 올라가는 속도로 분다. 시나이의 산지와 다미에타, 발팀, 시디 바래니 등 북부의 일부 해안 도시에는 눈이 내리며,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드물게나마 내리기도 한다. 서리는 시나이 중부나 중부 이집트에서 볼 수 있다.
이집트는 해마다 나일강에 일정한 홍수가 일어나, 이집트의 토양을 다시 비옥하게 만들어준다. 덕분에 이집트는 연중 내내 수확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인구가 밀집한 이집트의 해안 지대를 위협하고 있으며, 이집트 경제, 농업, 산업에 중대한 결과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 기후 전문가에 따르면 인구 증가 압력과 더불어 해수면 상승으로 금세기 말에 수백만 명의 이집트인이 환경 난민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한다.
이집트의 역사
고대이집트(파라오 왕조)
이집트 역사는 나일강을 빼고 논할 수 없다. 나일강은 그 지역에 처음 사람이 정착했을 때부터 이집트의 경제, 사회, 정치, 종교 생활의 중심이었다. 5000여년 전(BCE 3100년) 메네스Menes왕이 남·북 이집트를 통합해 멤피스Memphis에 도읍을 하면서 이집트 최초의 안정적인 왕조가 확립되었다. 그 후 2700년간 50명 이상의 파라오Pharaoh(고대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와 30여개의 왕조가 명멸했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침공(BCE 332년)한 후부터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외국의 지배가 이어졌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BCE 2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그 후 500년간 파라오의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사원과 피라미드도 점점 더 웅장해지고 규모가 커졌다. 군주의 권력은 제4왕조 시기에 극치를 이루었고 케오프스, 케프렌, 미세리누스 왕은 기자Giza에 세 개의 대大피라미드를 세웠다. 제6왕조와 제7왕조 시기에 권력이 분산되어 작은 공국들이 나타나 봉건제가 확립되었으며, 테베(오늘날의 룩소르Luxor)에 독립된 왕국이 세워졌고 메투호텝 2세의 치하에서 이집트는 다시 파라오 한 사람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50년 후 이집트는 귀족과 장관들의 분열로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서 힉소스Hyksos족이 북동쪽으로부터 침략해 왔고 1세기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다음 400년 동안 투트모시스 1세를 비롯한 여러 통치자 아래에서 신왕국이 번영했다. 투트모시스 3세는 이집트의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제국을 서아시아까지 확장했다. 아크헤나텐(아메노피스 4세)의 사위인 투탄카문이 9년간(BCE 1361~BCE 1352) 이집트를 다스린 후 이집트는 장군들, 즉 람세스Ramses 1,2,3세와 세티Seti 1세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스 로마시대
이집트 고대왕조는 BCE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침입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프톨레마이오스Ptolemies 왕조를 세움으로써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국가통합 차원에서 파라오왕조 시대의 건축 양식을 답습한 신전을 건축하고(Dendarah, Philae, Edfu 지역), 파라오 왕조 시대의 이집트 신들을 모방한 그리스신화를 도입하였다.
이후 BCE 30년에는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Octavian(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Antonius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연합군을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물리치고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합병되었다. 3,4세기에 들어서 로마 제국이 분열됨에 따라 외부 세력이 다시 이집트를 침략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령의 이집트는 아랍인들이 들어올 때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이슬람시대
CE 640년에는 칼리프Khalif(이슬람 수장) 우마르Umar의 명령에 따라 이슬람군이 동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슬람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우마이야Ummayya(다마스커스) 왕조 및 아바스Abbasid(바그다드) 왕조 등으로부터 파견된 이슬람 총독이 이집트를 지배하였고 이 기간중 많은 콥틱 교도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어가 콥틱어를 대체하였다.
이어 969년에는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마호메트)의 사위인 알리Ali(예언자의 딸 파티마Fatimah와 결혼)를 정통 칼리프로 인정하는 시아파 이슬람 왕조인 파티마Fatimah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969-1171)하였고, 이 시기에 가와르라고 불리는 그리스인 알무이즈의 통치하에서 알카히라Al-Qahira(카이로Cairo: 승리자라는 뜻)시가 세워져 수도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로 천도하였다.
11세기에는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진 십자군전쟁이 일어났는데, 이집트를 침입한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셀주크튀르크Saljuk Turkey의 술탄Sultan이 파견한 살라흐앗딘Salah Ad Din이 십자군을 물리친 후 이집트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여 아이유브Ayyub 왕조(1171-1250)를 열었다. 살라흐앗딘은 카이로를 요새화하였으며 1187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살라흐앗딘 자신이 고용한 터키계 노예 출신인 맘루크Mamluk족 용병에 의해 아이유브 왕조는 무너지고 맘루크Mamluk 왕조(1250-1517)가 세워져 2세기 반 동안 이어졌고, 이어 터키계의 오스만Ottoman 왕조(1517-1882)의 지배로 넘어가 나폴레옹 침략 때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 시대
1798년에 이르러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하여 1801년까지 잠시 동안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 시기에 프랑스 학자들에 의해 로제타석Rosetta Stone 발견(1799) 등 많은 고고학적 유물 및 유적이 발굴되어 이집트 문화가 재조명을 받기도 했다.
이집트에 근대 왕조가 들어선 것은 프랑스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1805년 오스만 제국에서 파견한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가 이집트 총독 자리에 오르면서였다. 그는 이집트 정착 후 정치, 군사, 경제개혁 단행 등 근대 이집트 건설의 기초를 닦고, 수단 정벌(1820), 팔레스타인 지역 및 아라비아 반도 파병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었던 이집트를 1801년 영국이 다시 빼앗았지만 결국 영국인들도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축출되었다. 알리의 장손 이스마일Ismail은 대규모 국토 개발계획(수에즈운하 건설, 철도, 통신, 공장, 관개수로 등)을 추진하였으나 그로 인한 외채의 누적(1875년 영국 정부의 수에즈운하 주식 43% 매입)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1876년 외채 상환이 정지됨에 따라 공채정리위원회(영, 불, 독, 이, 오)에 의한 국가재정 관리가 실시되어 이집트 식민지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1882년에는 아라비Arabi 등 민족주의 그룹이 주도한 알렉산드리아 반영反英폭동이 발생했는데 이의 진압을 구실로 영국군이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고 카이로를 점령한 이후 사실상 영국 총영사에 의한 이집트 통치가 시작되었으며,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보호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이집트는 1922년 명목상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입헌군주국이 되고 국제연맹에 가입하였으나 영국의 실질적 지배는 지속되었다. 하지만 전세계에 불어닥치던 민족자결주의 열풍과 함께 와프드Wafd당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격렬해져 1936년 독립국이 되었으나, 여전히 영국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 끌려다니며 연합군에 참전했기 때문에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는 거의 누리지 못했다.
이집트공화국의 출범
그러던 중에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제1차 중동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패전하면서 이집트는 국정의 혼란이 야기되었고, 이에 1952년 나세르Nasser 중령 휘하 자유장교단의 혁명에 의해 군주제가 폐지되고 이집트아랍공화국이 건립되었다. 이로써 BCE 4세기 이래 약 2300년간에 걸친 이민족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후 나세르가 대통령이 되어 1956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과 프랑스 및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으로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미국과 소련이 나선 국제연합UN의 중재로 휴전하게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이집트가 승리한 형국이 되어 아랍의 자존심을 회복한 나세르 대통령은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나세르 사후 1970년에는 사다트Sadat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친서방 온건 노선을 추구하였다. 1973년 10월에는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연합군이 시나이 반도 등의 회복을 위해 이스라엘과의 제4차 중동전쟁(10월전쟁;욤키푸르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전과 달리 이스라엘측에 심각한 타격을 줌으로써 아랍에 대한 서구 및 이스라엘의 인식 전환이 이뤄졌고 이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상으로 이어졌다. 1978년 미국의 중재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고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1982년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추진하던 사다트 대통령이 공식 행사 도중 이슬람 과격파에게 암살당한 뒤, 부통령이던 무바라크Mubarak가 대통령에 취임하여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와 사다트의 친서구주의의 장점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중도주의를 추구하였다.
최근 급변하고 있는 이집트 정세
무바라크는 2005년 5선 대통령에 오르는 등 장기독재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2010년말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불어닥친 아랍의 봄 재스민혁명의 여파로 인한 2011년 1월 25일의 이집트 시민혁명에 의해 국민들로부터 축출되었다. 이후 무르시Morsy 대통령 정부가 들어섰다가, 다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2013년 7월 군부가 개입하여 무르시를 축출하고 만수르Mansour 대통령 권한대행의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무르시 축출을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 양 진영의 전국적 시위가 격화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이집트 정국의 향방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정치 및 행정
이집트의 정치체제는 대통령 중심제에 내각책임제 요소를 가미한 중앙집권적 정부형태이다. 이집트는 2011년에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30년간 독재정치를 해 온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나고, 2012년 6월 이집트 사상 첫 자유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결과 이슬람 근본주의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이 지원하는 무르시Mohamed Morsy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무르시는 무바라크 축출 이후 실권을 쥐고 있는 세속주의 군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사법기관의 의회 해산권을 제한하고 대통령이 공포한 법령이나 규칙이 최종적인 효력을 갖는다’는 내용이 담긴 새 헌법 선언문을 내놓음으로써 군부의 반발뿐만 아니라 이집트 전체의 여론을 악화시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를 야기시켰다. 시민혁명을 이끈 이집트국민들은 권력을 잡은 무슬림형제단의 무능과 제정일치 신정회귀의 초헌법적 정치행보 등에 크게 실망하고 ‘혁명이 탈취당했다’라고 분노하며 거국적인 반反무르시·반反무슬림형제단 시위를 고강도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혼란한 정국이 계속되자 이집트 군부는 2013년 7월 3일 무르시를 강제 축출하고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아들리 만수르Adly Mahmud Mansour를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하젬 엘베블라위Hazem el-Beblawi를 총리로 내세웠다. 하지만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무르시의 복권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진압경찰 간, 무르시 찬반세력 간의 유혈 충돌이 전국 각지에서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1천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이집트 최대 이슬람 조직 무슬림형제단의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만수르 과도정부는 2013년 12월 이집트 신헌법안 230조를 공표하여 2014년 헌법안 국민투표와 대통령 선거 및 의회 선거 실시를 로드맵으로 제시한 상태이다.
입법부인 이집트 의회는 현재 해산 상태(해산 이전 하원People's Assembly 508석, 상원Shura Council 270석)이다. 양원 모두 시민혁명 이후 해산되었다가 2011.11월~2012.2월간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으나, 2012년 6월 최고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하원이 해산되고, 2013년 7월 군부의 대통령 축출 조치 이후 상원도 해산되었다.
새로 공표된 이집트 신헌법안 230조에 의하면 향후 예상 정치일정은 2014년 1월초(중순)에 헌법안 국민투표 통과 및 발효, 2014년 2월초(중순)~4월초(중순)에 대통령 선거 또는 의회선거 실시 개시로 잡혀있다. 신헌법안에 의하면 국가 원수이고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며, 의회는 최소 4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고 의원의 임기는 5년이다. 또한 대통령은 필요시 국민투표를 통해 의회를 해산할 수 있으며, 의회는 재적 과반수의 서명을 거쳐 3분의 2 동의를 얻으면 대통령에 대한 신임을 철회하고 초기 대통령 선거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법부는 헌법상 법원과 재판관의 독립성이 보장되어 있으며, 기초법원(Primary Court)과 행정법원(Administrative Judiciary) 및 대법원(The Supreme Court of Appeal or Cassation Court)의 3개 기관으로 조직되어 있다. 쟁송 단계는 3종의 하급법원과 최고법원으로 구성된다. 제1심은 각 주에 있는 지방법원, 제2심은 19곳의 중앙법원, 제3심은 6대 도시에 있는 공소법원이 담당한다. 각 법원에는 형사·민사 법정이 있으며, 최종판결은 카이로에 있는 최고법원이 내린다. 최고법원은 장관·부장관 외에 36명의 판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집트의 근대적 사법제도 시행은 영국이 사실상 이집트를 지배했던 1883년부터 시작되었다.
지방행정은 카이로주·알렉산드리아주 등 27개 주로 되어 있고 그 밑에 군과 읍이 있다. 임명제도에 의해 각각 주지사·군수·읍장을 두고, 주·군·읍에는 각각 지방자치의회가 있는데 의원은 일부 지명된 의원 외에는 일반투표로 선출된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하다.
경제
이집트는 부분적으로 자유기업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가진 개발도상국이다. 국민총생산(GNP)은 인구증가율보다 더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지만, 1인당 GNP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다. GNP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부문은 공업(석유생산 포함)이며, 농업, 공공사업과 방위산업, 무역과 금융이다.
이집트의 농업은 나일 강 계곡과 삼각주 평야 및 몇 군데의 오아시스 주변에서 매우 집약적으로 행해진다. 경지총면적은 국토의 2.3%에 불과하며, 주민의 49%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 농토에서 연간 2∼3모작으로 각종 작물을 생산한다.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매우 높으며, 경제작물로는 면화재배가 중심이고, 식량작물로는 옥수수, 밀, 보리, 쌀, 콩, 과실, 사탕수수 등이 재배되고, 기타 오아시스의 관개농업지대에서 대추야자·기름야자 등을 생산한다. 면화는 최고급이며 총수출의 60%를 차지한다. 토지개혁의 결과 대지주의 수는 줄었으나 영세농민이 전농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정부는 이들의 협동화를 추진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구가 급증하고 많은 농지가 환금작물의 재배에 충당되기 때문에 국내 소요 식량의 절반 이상을 수입한다.
광업은 석유와 천연 가스의 채취가 주종을 이루며 제조업을 합쳐 GDP의 22%를 차지한다. 광업은 노동인구의 0.3%를, 제조업은 16%를 차지한다. 주요제품은 정유제품, 시멘트, 면직·모직의 직물과 의류, 밀가루 등이다. 고대와 중세의 기념물들, 온화한 겨울기후, 지중해안의 해수욕장과 휴양지들은 관광산업을 이끌고 있다.
이집트는 산업의 약 70%가 국유화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5개년 계획을 세워 경제를 관리하며, 자유기업과 외국의 투자를 장려한다. 수에즈 운하의 소통이 1975년 재개되고 석유와 천연 가스가 생산되면서 경제는 호전되었으며, 외국의 자본 투자가 개발계획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총노동력은 인구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며, 노동조합 활동은 합법화되어 있다. 높은 인구증가율 때문에 이집트는 계속 저개발의 진통을 겪고 있다.
철도망은 국유회사인 이집트철도에서 운영한다. 내륙수로는 총길이가 3,200km를 넘는데, 160km가 넘는 수에즈 운하Suez canal를 제외하면 전부가 나일 강 수로이다. 수에즈 운하로는 해마다 2만여 척의 배가 지나다닌다. 정부 소유의 이집트항공에서 국제·국내 항공편을 제공한다. 수출은 주로 원유와 정제품 및 면직물과 면사로 이루어지며, 이집트의 최대수출국은 이탈리아이다. 수입액은 통상 수출액보다 훨씬 많다. 주요수입품은 식료품, 기계류와 전기기구, 수송장비, 화학제품 등이며, 주로 미국, 독일, 프랑스로부터 수입한다. 해외근로자들의 송금이 큰 폭의 무역적자를 줄이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문화와 종교
사회 문화적 특성
이집트는 피라미드와 신전으로 대표되는 수천 년의 문화적 전통과 지중해의 여러 문화, 이슬람, 서유럽 문화가 혼재되어 있으나 이슬람의 영향이 가장 강하다. 하지만 이슬람교 계율을 지키는 일은 다른 나라처럼 엄격하지 않다. 카이로에는 전 인구의 8분의 1이 살고 있는데, 주택난과 계층간 소득격차가 심하고 실업률이 높아 많은 기술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주변의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으로 일거리를 찾아 나간다.
대부분 이집트인의 삶과 생활 방식은 수백년간 거의 바뀌지 않았다. 물론 현대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 농민들의 현재 생활은 달라진 것이 없다. 대부분 이집트인들은 숙명론자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고, 회화는 이집트인 생활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현대 화가로는 가즈비아 세리Gazbia Serri, 인지 에플라툰Inji Eflatoun, 압델 와합 모르시Abdel Wahab Morsi, 아델 엘-시위Adel el-Siwi, 와힙 나세르Wahib Nasser 등이 있고, 대중음악 가수로는 '이집트의 어머니' 옴 콜트훔Om Kolthum, 압델 할림 알-하페즈Abdel Halim al-Hafez와 모하메드 아브드 엘-와하압Mohammed Abd el-Wahaab, 이헵 터픽Iheb Tawfik, 모하메드 푸아드Mohammed Fouad, 하킴Hakim 등이 있다. 작가로는 나귑 마푸즈Naguib Mahfouz는 1988년 '카이로 삼부작(The Cairo Trilogy)'으로 노벨 문학상을 탔고, 다른 작가로는 나왈 엘-사다위Nawal El-Saadawi, 터픽 알-하킴Tawfiq al-Hakim, 야흐야 하키Yahya Haqqi, 유수프 이드리스Yusuf Idris 등이 있다.
이슬람(혹은 Hjira) 달력은 그레고리안(서구) 달력보다 11일이 짧으므로 공공 휴일이나 축제는 매년 11일씩 일찍 열린다. 라스 아스-사나Ras as-Sana는 이슬람력의 새해 첫날을 축하하는 것이고 모우리드 안-나비Moulid an-Nabi는 예언자 마호멧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으로 7, 8월경이다. 라마단Ramadan은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 동안(현재는 1,2,3월 경) 열리는 행사로 이슬람력에서는 아주 중요한 행사이다. 이 달은 모하메드에게 코란이 계시되었으므로 신앙에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매일 해지기 전까지는 음식도 물도 입에 대지 않는다. 라마단이 끝날 때(Eid al-Fitr)에는 축하의식과 잔치를 벌이며 단식을 깬다. 에이드 알-아드하Eid al-Adhah는 메카Mecca로의 순례 기간으로, 모든 이슬람교도는 적어도 일생에 한 번 이 순례를 하도록 되어 있다. 거리는 다양한 색깔의 등불로 장식되고 아이들은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뛰어 논다. 각 마을에서 마흐말Mahmal 의식이 열리고 지나가는 순례자들은 여행을 위한 깔개와 수의를 얻는다. 이 행사는 4, 5월경에 열린다.
이집트의 일반 공립교육은 초등(6년)·예비(3년)·중등(3년)의 3단계로 되어 있다. 6∼12세의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계속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 정부의 일반교육제도와 병행하여 이슬람교 기관들이 제공하는 교육제도가 있다. 알아자르 대학교는 세계 유수의 이슬람·아랍 학문의 중심지이다. 교육 서비스의 확대에도 15세 이상의 주민 가운데 55%가 문맹자일 정도로 이집트의 문맹률은 여전히 높다. 이집트의 언론은 1973년 검열이 해제된 이후 비교적 자유롭게 정치·경제 문제들을 비판하고 있다. 전파 매체는 정부에서 관리한다.
이집트의 종교
이집트에서는 고대 창조신화의 신들을 숭배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 전통들이 축제 등의 형태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오늘날 이집트의 종교 분포는 수니Sunni파 이슬람교도가 약 90%로 대다수를 차지하며 그 외 7~10%는 이집트의 전통적인 기독교인 콥트교회Coptic Church나 19세기에 들어온 개신교를 믿는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왕조 시대 피라미드 유적에서부터 종교에 관한 기록들이 발견된다. 주로 태양신 라Ra, 빛의 신 아툼Atum, 공기의 신 슈Shou, 수증기의 신 테프누트Tefenut 등 창조신화 중심의 신들을 모시는 종교적 의식이 왕(파라오Paraoh) 또는 제사장 주재로 매일 신전에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는 형태로 거행되었다. 일반 대중들은 일상적인 제사의식에는 참여할 수 없었으나, 질병 치료 등을 위해 신전 출입은 허용되었다. 각 신전들은 1년에 몇 차례씩 고유의 축제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나일강 범람 익월에 지내는 오페트Opet 축제처럼 농경생활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이집트에서는 부활의 신 오시리스Osiris 신화 등의 영향으로 시신을 보존하기 위한 미이라 수술이 왕족 및 귀족층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인간에게는 생명이 끊어져도 파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믿음에서 사후세계에 대비하여 무덤 속에 노예의 모형, 배, 식량, 집모형 등을 함께 부장하였다.
이슬람교는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Gabriel을 통해 계시받은 알라Allah신의 메시지를 그대로 기록한 코란Quran을 신앙의 지침으로 삼는다. 이슬람에는 성직자 제도가 없으며 모스크(이슬람 사원) 예배는 연장자인 남자 또는 이슬람 교리에 밝은 남자가 인도한다. 또한, 이슬람교에서는 은둔주의 또는 수도원 생활 등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슬람 교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그룹(Sufi)을 형성하여 사회현실에 참여하면서 이슬람원리주의에 따라 사회개혁을 추구하려는 전통이 있다.
콥틱교는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주교제의 기독교 교파로서 마가Mark가 CE 50년경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근교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창설해 포교활동을 시작한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3세기 후반까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284년(콥틱 순교 원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가 로마 황제 즉위 후 이집트 지역을 점령하고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하였으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는 312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수의 인성보다 신성만 강조해 인정하는 단성설 신학으로 인해 양성설(예수의 인성과 신성 양면성 인정)을 주장한 로마 교회와 분리되었다. 콥트 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수도원 운동 등의 초대교회(고대교회) 신앙과 전통을 보존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들의 콥트어 성서는 성서학적으로 가치가 큰 고전 문헌이다.
한국과 이집트의 관계
이집트는 아랍권내 최대 인구를 가진 국가이며, 아프리카·중동·유럽을 잇는 중심지로서 한국은 이집트와의 우호·협력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아·중동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하려는 정책 기조를 갖고 있다. 중동 지역의 안정은 우리나라 에너지 안보 및 경제이익 확보에 긴요하기 때문에 중동 평화 및 안정을 위한 이집트의 노력을 평가하고 지지하는 입장에 있다. 이집트 또한 한국과의 실질 협력관계 중시 정책을 기조로 하고 있다. 1970년대 중후반 실용주의 정책에 따라 우리와의 정치·경제적 관계를 보다 중시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정책을 전환해왔으며,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공유하고 한국 기업들의 이집트 투자진출 확대를 희망하고 있다. 또한 한반도 비핵화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및 한반도 긴장 완화지지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이집트는 나세르 대통령과 사다트 대통령 초기인 1970년대 중반까지는 1950년대 이래의 비동맹 운동, 1973년 중동전쟁시 북한의 대이집트 군사 지원 등 국제무대에서 친북한 일변도 정책을 견지하였고 1963년 북한과 국교를 수립하면서도 한국과는 영사관계(1961년)만 유지하였다. 사다트 대통령은 1970년대 후반부터 문호개방 정책을 표방, 친서방 정책을 추구함에 따라 한국과의 경제·통상관계도 점차 신장되어 한국과의 실질적 경제관계를 중요시하면서도 미수교 상태는 계속 견지하였다. 1973년 중동전쟁 당시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무바라크 대통령은 북한의 공군 지원을 의식하여 한국과 미수교 상태를 유지해오다 1990년대 초 냉전 종식,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인한 한반도 정세 변화에 편승하여 1995년 4월 13일 한국과 국교를 수립, 비로소 공식적으로 남·북한 동등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이 과정에서도 한국과의 실질적 경제 관계는 계속 증대되었다.
수교 이후 정치·경제·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양국간 협력관계는 더욱 긴밀화되었다. 1999년 4월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국빈 방한,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이집트 국빈 방문이 이루어졌고 특히, 경제·통상 분야의 협력이 꾸준히 확대되었다. 1990년대 초반 2억 달러 수준의 교역액이 2010년 31.8억 달러(수출 22.4억 달러, 수입 9.4억 달러)로 15배 이상 증가하였고, 이집트 교역 순위 10위(수입은 미, 중, 독, 이, 불, 러 에 이어 7위)로 부상했다. 2012년 현재 양국의 교역량은 26억 달러인데, 자동차·전자제품 등이 이집트로 수출(18억 달러)되고 있으며 천연가스 등이 이집트에서 수입(8억 달러)되고 있다. 대이집트 투자 규모는 KOTRA 및 39개 업체가 참여하여 72건, 3.21억 달러(1980~2012년 누계, 신고 기준)를 기록하고 있다. 문화·학술 분야 협력도 확대되어 2010년 수교 15주년 기념 한국문화 페스티벌 및 한·중동 학술세미나 개최를 비롯하여 한국영화제, 태권도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등을 연례적으로 개최,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의 제고와 한류의 확산이 지속되고 있다.
2011년 이집트 시민혁명으로 인한 무바라크 대통령 하야와 민주 선거에 의한 2012년 무르시 대통령 취임, 그리고 다시 군부의 개입으로 2013년 만수르 대통령의 과도정부가 들어서는 등 정국의 큰 전환기를 맞이한 이집트는 현재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전반적인 점검 과정에 돌입해 있다. 하지만 경제우선 정책하에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공유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이집트는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집트 신화
고대 이집트인들은 수백, 수천에 이르는 신과 여신을 섬기는 다신 숭배 신앙을 가졌다. 고대에 태양신인 라Ra가 딸 마아트Maat를 데리고 지상으로 내려와 이집트를 세우고 다스렸다. 진리와 정의의 여신인 마아트는 지혜의 신인 토트Thoth왕과 결혼하고, 아들 ‘오시리스’, ‘세트’, 와 딸 ‘이시스’, ‘네프티스’를 낳았으며, 오시리스는 이시스와, 세트는 네프티스와 각각 결혼하여 호루스를 낳고, 세트는 아누비스를 낳았는데, 세트는 형을 시기하여 음모를 꾸미는데, 오시리스 사이즈에 맞는 관을 만들고, 누구든지 관에 들어가 사이즈가 맞는 사람에게 관을 선물로 주겠다고 하자, 오시리스가 들어가니 관을 닫고 나일강에 띄워 보낸다. 그러나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기적의 힘으로 남편을 지하 세계에 부활시키고 아들 호루스를 낳게되고, 호루스는 자라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왕위를 되찾아 지상 최고의 신이 되어 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시리스는 죽은 후 저승의 왕이 되어 영생을 심판하는 신이 되었고, 이시스는 사랑의 여신으로 섬겨진다.
헤브루나 고대 그리스 문명은 오늘날까지 세계문명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고대 이집트 문명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단절되어 버렸다. 오시리스나 아누비스 같은 신들은 단지 머나먼 과거의 존재에 불과할 뿐, 오늘날 그 누구도 이 신들에게 의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신비에 둘러싸인 이집트 문명 앞에 그저 경탄할 뿐이다. 왜냐하면, 독일의 이집트 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n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는 ‘차가운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뜨거운 사회’가 변화를 수용하는 사회라면 ‘차가운 사회’는 역사의 변전變轉이 불러오는 모든 변화를 거부하고 무화無化시켜 버리는 사회이다. 모든 문명과 문화는 글로 쓴 것이든 아니든 그 문명을 이루는 중심 텍스트들이 있는데, 정전의 주석과 주해를 받아들이고 또 다시 질문함으로써 혁신을 이루는 헤브루 문화권이나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이집트는 이 텍스트를 완벽한 정전으로 만들어 주석과 재해석을 거부한다. 이러한 문명권에서는 한번 정립된 진리는 단지 반복만 되어 자기 스스로 갇혀 버린 세계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파라오
이집트의 국왕은 파라오(Pharaoh: 큰 집)라 불리웠고, 살아있는 신으로서 전지전능한 힘을 갖는 절대적인 존재로 여겼으며, 왕이라기 보다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그의 영혼은 신적인 것으로 항상 새롭게 재탄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머리에는 네메스라는 두건을 쓰고, 의식용 가짜 수염을 달고,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왕홀을 들고 있었으며, 머리 가운데에 있는 코브라는 적이 나타날 경우 언제라도 불침을 쏘아 왕을 보호한다고 믿었다.
미이라
이집트인들은 죽은 뒤 다른 세상에서 영원히 다시 산다고 믿었으므로. 죽음을 정복하여 오시리스 왕이 다스리는 영생의 왕국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오시리스 신의 심판을 받아 내세로 들어 갈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이 세상으로 돌아와 자신의 몸에 다시 찾아온다고 믿어 죽은 후에도 영혼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몸을 썩지 않게 보존하고자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었다.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세계 지역 문화 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양성 속의 통일을 지향하는 인도네시아 (0) | 2016.11.03 |
---|---|
'돌아온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 (0) | 2016.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