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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종도사님 말씀/주제별 말씀

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쉬어갈꼬?

by 알라뷰 소녀시대 2014.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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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泉(황천)에 無酒家(무주가)하니 今夜(금야)에 宿誰家(숙수가)오
 

 
 가치관이라 하는 것은 물질로써는 환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질로써 환산할 수 없는 것이 가치관이다.
 
 조선시대 때 사육신에 성삼문(成三問)이 있다. 수양대군이 열두 살 먹은 조카 단종을 삭탈관직해서 노산군이라 하고서 강원도 영월 청룡포로 귀양을 보냈다. 그 때 사육신 생육신이 생겨났다. 사육신이 누구냐 하면 성삼문, 이개, 박팽년, 유응부, 유성원, 하위지다.
 
 그런데 성삼문 아버지가 이길 승 자 성승(成勝)인데, 수양대군이 성삼문을 설복시키려고 그 아버지를 잡아다 대궐 뜰에 벗겨놓고서는 쇠로 만든 인두를 참숯불 같은 데 벌겋게 다려서 등짝서부터 장단지 이런 데를 그냥 막 지져댄다. 그러면 살댕이가 지글지글 타면서 연기가 풀풀 나고 고기 익는 냄새가 나고 그런다.“ 자, 니가 항복을 하면 니 애비가 이런 악형을 안 당한다. 항복을 해라.”그런다. 허나 성삼문이는 아버지가 그런 악형 당하는걸 보면서 참 안 됐지만 눈도 깜짝 안 한다. 성승이 그렇게 해서 죽었다.
 
 항복을 안 하니까 종국적으로 성삼문의 서너 살먹은 아들을 잡아다가 성삼문이 보는 앞에서 자루에다 집어넣고 대뜰에서 냅다 태질을 시킨다. 태질시켜서 깨트려 죽인다. 하니까 성삼문이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하니까 수양대군 하는 소리가‘저런 역적 같은 놈 봐라, 지 애비는 인두로 지져도 눈도 깜짝 않더니 제 새끼를 죽이니까 눈물을 뵌다’고 한다.
 
 그러니까 성삼문이가 한 소리를 한다.“ 우리 아버지는 왜 죽는 줄을 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천지에 생생지리(生生之理)로써 생겨나서 세상에 왔다가 왜 죽는지를 모르고 죽는다. 그래서 비정한 그 불의에 분해서 내가 눈물을 흘렸다.”고.
 
 가치관이라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가치관을 위해서 사육신도 되고 생육신도 된다. 사육신의 그 처절한 역사. 지나간 인류 역사라 하는 것은 그렇게 상극이 사배해서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그러면서 성삼문이 죽으러 나가면서 이런 시를 읊는다. “황천(黃泉)에 무주가(無酒家)하니 금야(今夜)에 숙수가(宿誰家)오.”황천에는 술집이 없을 게다. 목 베여 죽어 황천에 가서도 술 한 잔 사먹고 싶을 텐데, ‘금야에 숙수가오.’술집도 없으니 술 한 잔도 못 사먹고, 또 잘 집도 없을 테니 오늘 저녁에는 뉘 집에서 잘꼬. 죽는데 잠을 어디서 자나. 그냥 그렇게 읊은 소리다.
 
 인간이 초목과 더불어 같이 썩어질 수는 없잖은가? 우리는 사람인지라 가치관을 바탕으로 해서 진리에 살다 진리에 죽어야 한다.
 
 
 성삼문 절명시(絶命詩)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구나
 
 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쉬어갈꼬?
 
 
 성삼문 본관 창녕(昌寧). 자 근보(謹甫)·눌옹(訥翁). 호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사육신의 한 사람. 1418(태종18)년 무관 성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시 그의 모친이 꿈에서‘낳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받았다고 해서 이름을 삼문이라 지었다.
 
 1435(세종17)년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였고 14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집현전 학사·수찬 등을 역임했다. 그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2년 박팽년(朴彭年)·신숙주·하위지·이석정(李石亭) 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한글창제를 위해 음운연구를 하여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공헌했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아버지 승(勝)·박팽년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협의했으나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처형되었다. 아버지 승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세 동생과, 맹첨(孟詹)·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당했다.
 
 1676(숙종2)년 홍주(洪州) 노은동에 있는 그의 옛집 녹운서원(綠雲書院)을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서원에 6신과 함께 제향되고, 1758(영조34)년에는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문집에『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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