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진 비운의 천재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895년 조선의 대들보였던 동학혁명군이 조일 연합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당시 집권층은 노론. 인조 반정 이후 이 나라를 지배하며, 다른 당을 절멸시켜가며 생존했던 이들은 급기야 국내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나라의 군대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이후 국운이 쇠하기 시작한 1897년 고종은 마지막 승부수로 환구단에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13년간 나라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헛되이 결국 일본제국주의 마수에 국권은 피탈되었다. 1905년 외교권을 넘긴 을사오적乙巳五賊(: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은 전원 노론이었고,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총리대신이자 마지막 노론 당수로 소위 한일합방 조약에 서명한 이완용은 당론으로 나라까지 팔아먹었다.
전쟁 한번 안하고 나라가 망했다. 왜 그랬을까? 이들 서인(노론)의 사상적 뿌리는 흔히 알려진 율곡 이이나 우계 성혼이 아니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역사의 뒤안길에 감춰진 인물로, 당대 제일의 천재로 일컬어지는 구봉 송익필이다. 송구봉을 이해하지 않고는 조선 중·후기 당쟁뿐 아니라 서인(노론)들이 왜 그런 행보를 보였는지 알 수가 없다. 반대로 송익필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게 되면 조선 후기 안개에 덮인 정치사와 사상사의 많은 실마리들이 깨끗하게 풀리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병자호란 이후 전개된 예송 논쟁이나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서 죽어야 했는가의 문제, 그리고 정조에 대한 암살 위협, 탕평정치, 세도정치 등에 얽힌 사건의 단초를 헤아려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말이다.
일본은 조선이 당쟁을 하다 망했다고 했는데 바로 당쟁의 뿌리가 송구봉이다. 이 분열과 대립의 뿌리를 정확히 파악할 때에야 진정한 통합주의로 가는 길도 열릴 수 있다고 본다. 이제 뛰어난 재주와 경륜을 가졌던 그가 어떤 선대의 악업과 시대적인 환경으로 인해 그 꿈이 좌절된 ‘비운의 천재’가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송구봉의 시 ‘하늘 천天’
君子與小人(군자여소인) 所戴惟此天(소대유차천)
군자와 소인은 오직 같은 하늘을 이고 살건만
君子又君子(군자우군자) 萬古同一天(만고통일천)
군자는 또 군자가 되어 만고에 똑같은 하늘로 여기네
小人千萬天(소인천만천) 一一私其天(일일사기천)
소인은 하늘을 천만 개로 여기고 하늘을 하나하나 사사로이 여겨서
欲私竟不得(욕사경부득) 反欲欺其天(반욕기기천)
사사롭게 하려다 끝내 얻지 못하고 돌이켜 그 하늘을 속이려 하네
欺天天不欺(기천천불기) 仰天還怨天(앙천환원천)
하늘을 속이려 해도 하늘 아니 속으니 하늘을 우러르다 도리어 원망하네
無心君子天(무심군자천) 至公君子天(지공군자천)
사심 없음이 군자의 하늘이고 지극히 공평함도 군자의 하늘이라네.
窮不失其天(궁부실기천) 達不違其天(달부위기천)
곤궁해도 하늘을 잃지 않고 영달해도 하늘을 어기지 않는다네.
欺須不離天(기수불리천) 所以能事天(소이능사천)
잠시라도 하늘을 떠나지 않으니 하늘을 잘 섬기는 까닭이라네.
聽之又敬之(청지우경지) 生死惟其天(생사유기천)
듣고 또 공경하여 생사 간에 오직 그 하늘뿐이니
旣能樂我天(기능락아천) 與人同樂天(여인동락천)
이미 나의 하늘을 즐길 수 있다면 남들과 더불어 하늘을 즐기리라.
사노私奴 송익필을 체포하라! (주1)
기축옥사 조선 14대 임금 선조 22년 기축년(1589년) 12월 1일. 정여립의 난 여파로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났다. 그 처리과정에서 이 사건은 송구봉과 그 아우 송한필에 의한 조작과 모략이라는 제보를 받은 선조는 이들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56세로 지천명의 나이에 든 송구봉은 사노私奴라는 최악의 모멸적 호칭과 함께 과거가 드리운 그늘, 선대부터 뿌려진 악업의 결과를 받으며 자진하여 형조에 자수했다. 선대의 악업은 무엇이었는지, 문제가 발생한 시간으로 거슬러 가보자.
송사련의 고변 때는 중종 16년 신사년인 1521년 10월 11일. 당시 송구봉의 아버지인 송사련宋祀連(1496~1575)은 천문, 지리 등을 맡아보던 관상감의 종 5품 관직인 관상감판관觀象監判官이었다. 이날 송사련은 자신의 처남인 정상鄭瑺과 함께 승정원에 모반사건을 고발한다. 대상은 자신에게는 외삼촌과 외사촌에 해당하는 전 좌의정 안당安瑭(1461~1521)과 그 아들인 안처겸安處謙(1486~1521)과 아우인 처근處謹(1488~1543, 이조좌랑)과 처함處諴(1490~1521) 그리고 종실인물인 시산정詩山正 이정숙李正叔(세종대왕의 증손자로, 시산이란 호號이고 정正은 종친부에게 내린 정3품 관직)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南袞(1471~1527), 심정沈貞(1471~1531) 등이 기묘사화로 죽은 조광조를 지지했던 자신들을 비롯한 사림들을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여, 남곤, 심정 일파를 제거하여야 한다고 불평스러운 말을 주위에 하고 다녔다.
이들의 대화를 들은 송사련은 이를 관청에 일러바쳤다. 자신의 출세를 위한 목적이었다. 그 제보 내용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안당의 부인이 사망했을 때 문상을 온 사람들과 장례를 도운 일꾼들의 명부도 함께 제출하면서, 이들이 거사에 참여키로 했다는 것이다. 여러 명의 종친들이 거론되고 중종에 대한 폐립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건은 역모로 확대되었다. 당시에는 역모에 걸리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고 연좌하여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송사련의 고변으로 순흥 안씨 집안인 안당과 세 아들은 사형당하고, 집안은 멸문되었다. 안당의 재산과 노비는 송사련이 차지하였다. 또한 그 공으로 벼슬도 정3품 당상관 첨지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송구봉이 유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훗날 이 사건을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고 부른다. 무고에 의한 옥사라는 뜻이다.
얼녀 감정의 신분 이 고변 사건이 복잡한 이유는 안처겸과 송사련이 적서에 얽힌 친족사이였다는 사실이다. 즉 안처겸의 아버지인 안당과 송사련의 어머니인 감정甘丁은 이복 남매 사이였다. 안당은 아버지 안돈후의 적자였고, 감정은 비첩婢妾(종 출신의 첩: 본래 안돈후의 형 안관후의 종이었다가 안돈후가 데려다 첩으로 삼았다) 중금重今에게서 얻은 얼녀蘖女(천인 출신에게서 난 자식, 반면 양인 출신에게서 낳은 자식은 서녀庶女라고 했다. 이 둘을 합쳐 서얼庶孼이라 한다)였다.
어머니 쪽의 신분을 따르게 돼 있던(從母法) 당시 신분제로 보자면 송사련은 이중의 제약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즉 중금의 신분이 본래 안씨 집안의 노비였고, 신분제에 따라 얼녀 감정 역시 안당 가문의 노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감정이 양인 송린과 혼인하여 송사련을 낳았는데, 송사련은 어머니 신분에 따르면 안당 가문의 재산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서의 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안씨 집안의 도움으로 천한 신분을 면하고 관직에 올랐고, 신분을 넘어 신임을 받으며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기까지 한 입장이었음에도, 송사련은 이를 자신의 출세와 명예욕에 사로잡혀 역모 고변으로 답을 한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과 세인들은 송사련에게 등을 돌리며 심한 비난을 하였다. 송사련 자신은 80세로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악업에 대한 대가는 고스란히 자신의 자식들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1540년 중종 35년 안당에 대한 신원伸寃이 이루어졌다. 또한 송구봉이 대과 공부에 여념이 없던 1559년 명종 14년에는 이미 초시에 율곡 이이와 함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송구봉과 동생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의 대과의 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때 사관이었던 이해수李海壽는 서얼은 과거를 응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과거를 금지시켰다. 또한 송사련이 죽은 1575년 선조 8년에는 안당에게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주어져 관작의 환급을 통한 복권과 명예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1586년 선조 19년 안당의 아들 안처겸 등이 무죄로 밝혀져서 신원이 복권되고 송사련의 관작이 삭탈되었다.
노비환천 소송 치밀하게 와신상담하며 복수를 꾀하던 안당 집안 후손들은 송구봉의 정치적 보호막 역할을 하던 율곡 이이가 죽은 1584년 갑신년 이듬해인 1586년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동인의 공공의 적인 송구봉을 제거하기를 원하던 동인 강경파 이발李潑(1544~1589) 등의 후원을 얻어 송구봉 일가에 대한 노비 환천 소송을 진행하였다. “송익필 등은 원래 우리 집안의 노비이니 법에 의해 다시 불러 쓰고자 합니다.” 65년 전 명문가에서 하루아침에 폐족으로 전락해버렸던 원한을 푸는 일이었다.
안씨 집안에서는 안처겸의 장남인 로(璐:당시 70세)와 안로의 조카뻘되는 서출인 안정란安廷蘭이 앞장섰다. 적서 차별이 별로 없던 안씨 집안이었고, 집안 사람 대부분이 관직에 나가지 못한 반면, 안정란은 중간간부이긴 해도 외교 문서를 다루는 승문원承文院 이문학관吏文學館에서 봉직해 문장을 잘하고 재기가 있고 겁이 없는 성품이었다. 또한 종놈의 자식과 싸우는 데에 정실인 자신들보다는 정실 소생이 아닌 정란이 선봉에 서는 게 보기가 좋지 않겠냐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소장訴狀은 안로의 처인 윤씨 명의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었다. 법대로 한다면 비록 노비라도 2대 이상 양역良役(노비가 아닌 비양반의 신분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집안의 자손은 노비를 면하게 되어 있었다. 송구봉 형제들은 그의 할아버지(송린)에서부터 아버지 2대에 걸쳐 이미 관상감 등에서 근무를 하였다. 그리고 이미 조정 각지에는 송구봉의 제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송을 맡은 관청인 장례원掌隷院 관원들도 송구봉 형제의 환천還賤에는 소극적이었다. 송구봉 제자들은 안씨 집안 사람들을 만나 회유, 협박을 해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의 한과 상처가 너무 크고 깊었던 것이다.
동인 정윤희의 판결 하지만 법보다는 정치적인 세력 싸움에서 동인이 우세하였다. 동인의 이발과 백유양白惟讓 등은 해당 관청을 압박하였고, 송구봉의 할머니인 감정이 안씨 집안의 씨가 아닌 다른 종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송씨 집안의 양적良籍(양인임을 나타내는 문서)을 모두 없애 버렸다.
이때 장례원 판결사는 여러 번 바뀐 끝에 동인의 외곽인물인 정윤희丁胤禧(1531~1589, 아우 정윤복의 현손 정도태의 현손이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이 노론의 핍박을 받았던 이유는 여기서부터 비롯한다)였다. 정윤희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문과 장원을 한 인재였다. 1586년 7월 드디어 판결이 나왔다. “송사련의 후손 송익필 형제와 그 자손들을 원래대로 안씨 가의 사노비로 되돌려라”
조선 최고의 천재로 손꼽히던 송구봉이 노비가 되는 순간이었다. 황해도 배천에 모여 살던 송구봉과 일가 70여 명은 죽기 살기로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자취를 감춰버려야 했다. 안씨 집안의 보복은 집요했다. 이제 죽은 송사련은 법상으로는 노비의 신세가 되었고, 그런 노비가 주인을 무고하여 집안을 망하게 한 셈이니 그 죄는 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해야 할 터. 도끼며 괭이를 들고 가서 송사련의 무덤을 파헤쳤다. 누군가는 먼저 달려가 도끼로 머리를 내려치고 다른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죽은 자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과거에 대한 단죄였다. 찢기고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 유해遺骸! 인과응보因果應報런가. 안씨 집안에서 고용한 추노꾼들이 송구봉 일가를 잡기 위해 전국으로 추격을 시작했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그리고 송구봉 (주2)
정처 없는 도망자 신세지만,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숨어 살던 송구봉의 얼굴에는 수많은 주름이 드리워지고 흰머리는 더욱 많아졌다. 몸에 깃든 병과 마음고생이 더해 갈 무렵 엄청난 역모 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 그의 운명도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이른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己丑獄事다.
정여립의 모반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은 동래 정씨로 전주 동문 밖에 살고 있었다. 그의 태몽은 ‘고려의 역신 정중부가 나타난 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정희증鄭希曾은 사람들이 득남을 축하해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정여립이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까치 새끼의 부리와 발톱을 칼로 토막낸 일이 있었다. 정희증이 이것을 보고 누가 했느냐고 물으니 한 여종이 정여립이 한 일이라고 고했다. 이날 밤 정여립은 앙심을 품고 여종을 죽여버렸다. 이러한 그의 잔인한 면모에 사람들은 경악했고, 그의 아버지조차 아들을 두려워했다.
정여립은 1570년 선조 3년 25세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독서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 이이와 성혼의 문하를 왕래하면서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이이와 성혼은 정여립의 과격하고 급한 기질을 걱정하면서도 그의 박학다식함에 탄복해 조정에 천거하기까지 했다. 정여립은 언변이 능수능란하여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한번 입을 열면 좌중을 감탄시켰고, 비록 그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더라도 감히 그와 대적하려는 자가 없었다.
1584년 선조 17년 겨울, 율곡 이이가 죽은 뒤 정여립은 노수신, 이발 등에 의해 관직에 나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으로 매도했다. 선조 앞에서도 이이를 소인이라고 비난하여 선조는 정여립을 배은망덕한 인물의 표본으로 불리는 송나라 형서邢恕 같은 이라고 혹평했다. 이렇게 임금의 눈 밖에 나게 되어, 이발의 거듭된 천거에도 그는 등용되지 못했다.
이에 고향으로 내려간 정여립은 집권 동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현재의 왕 아래에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거짓으로 학문을 강론한다고 하면서 무뢰한을 불러 모았다. 그 중 황해도 안악 사람 변숭복, 박연령, 해주사람 지함두 등과 비밀리에 사귀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전주, 금구, 태인 등의 여러 무사와 노비 등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1587년 선조 20 정해년에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했을 때 정여립은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군사를 원조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왜적이 물러가고 군사를 해산할 때 정여립은 “너희는 뒷날에 또 어떤 일이 있거든 각기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일시에 모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군사 명부 한 벌을 가지고 돌아갔다. 당시 조선의 군사력은 왜국의 이런 변방의 침략에도 대동계 같은 사조직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허술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은 만약 군사력을 쥔 이가 있다면 반역을 꾀하기 좋은 여건이었다.
출세욕이 강한 정여립은 평소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天下公物豈有定主)라고 하거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王蠋(미상~BCE 284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이 한때 죽음에 임해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며 왕위 계승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세간에 떠도는 “목자(木子: 李)는 망하고 전읍(奠邑: 鄭)은 흥한다”는 참언을 민간에 널리 퍼지게 했다. 또한 정여립의 아들 옥남玉男이 태어날 때부터 눈동자가 두 개씩이고 양쪽 어깨에 사마귀가 일월日月 형상으로 박혀 있어, 이를 본 정여립이 반역을 도모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1589년 선조 22년 기축년 이러저런 비밀이 누설된 것을 알고 정여립은 모반을 일으키기로 했다. 하지만 겨울이 오기 전인 10월 2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사 한응인 등이 정여립의 역모를 고변했다. 황해감사 한준 역시 같은 내용의 비밀 장계를 보고하는데, 동인은 고변한 자가 이이의 제자들이라며 정여립을 두둔했다.
고변이 들어온 이상 진위를 알기 위해 정여립을 잡아들이고자 했는데 정여립은 변숭복과 아들 정옥남을 데리고 진안 죽도로 달아났다. 진안현감 민인백이 관군을 이끌고 이들을 추격하자, 정여립은 칼로 변숭복과 아들을 쳐서 죽인 후 자신은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스스로 찔러 죽었다.
그는 왜 자살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한 타살이었을까?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쳐 놓은 함정에 빠진 것인가? 그 배후 인물로 지목되는 게 바로 송구봉이었다. 율곡 사후 동인의 공격을 받아 벼슬에 오르지 못했던 서인이 쌓은 울분과 법리마저 무시하며 정치적 힘으로 일가를 도망 노비로 전락시킨 것에 대해 원한을 품은 송구봉이 동인 정권을 뒤집으려는 계책을 세웠고, 이들에게 정여립의 대동계는 좋은 먹잇감이었다는 것이다. 평소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대동계라는 사조직을 키우자 반란의 기미를 읽은 송구봉이 사람을 시켜 이를 고변하게 한 것이다. 동인을 공격하는 촌철살인의 상소문을 대신 써주고,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한 정철을 조정해 사건을 주도면밀하게 조작했다는 것이다.
기축옥사 또 하나의 사화로 불리는 기축옥사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서인의 실세였던 정철鄭澈(1536∼1593. 그의 누이 중에 인종의 후궁과 종친 계림군 이유의 부인이 있어 왕실의 인척이었다. 동인 영수인 이발과는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었고, 호남을 대표하는 유자의 지위를 놓고 보이지 않은 경쟁을 했다. 평소 술을 좋아하고 직설적인 성격이었다)은 우의정에 임명되어 사건을 조사하는 위관委官이 되어 가혹하게 다스렸다. 이에 역모와는 직접 관련이 없어도 정여립과 친분 관계나 친인척 관계에 있는 많은 동인 유력 인사를 연루시켜 처벌했다. 이발과 이길 형제, 백유양, 최영경, 정언신, 정개청, 김방 등이 억지에 가까운 죄목으로 처벌당했다. 약 1천명의 희생자가 나왔는데 호남 지역이 제일 피해가 커 이 일로 호남 유맥儒脈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선조의 실정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이었다. 이발은 사건 직전 낙향하면서 선조 아래에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고 통탄한 적도 있다.
그래서 기축옥사의 피해자들은 선조에 대한 ‘괘씸죄’에 걸려 희생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역모사건은 사실의 진위 여부를 추밀하게 살피기보다는, 한번 지목을 당하면 스스로 벗어날 수 없고 원통함을 밝힐 수 없는 마녀사냥식이 많았다. 결국 서인은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동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제 송구봉의 신원도 이루어지는가 싶었지만, 정철의 결정적 패착으로 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유배와 해배解配 그리고 만년晩年
왕세자 책봉 문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신묘년, 정철은 왕세자 책봉 문제에 연루되어 실각하고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던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에 앉혀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같이 주청을 하려던 영의정 이산해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나오지 않고 다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우의정 류성룡 사이에서 직설적 성격의 좌의정 정철 홀로 건저建儲(세자를 세우는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미 신성군의 외삼촌 김공량을 통해 왜곡된 사실(이산해를 통해서 정철의 배후에는 송구봉, 성혼이 있으며 이들이 정국을 좌지우지하고 건저문제를 통해 귀인 김씨 사이에서 난 신성군을 제거한 뒤 광해군을 허수아비 임금으로 세워 권력을 쥐려한다는 내용)을 알게 된 선조는 이 문제를 구실삼아 서인 세력을 붕괴시켜버린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건저문제를 이산해에게 이야기한 사람이 송구봉 자신이었다.
정철은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떠났다. 사형 바로 아래의 가장 혹독한 유배형인 위리안치圍籬安置, 극변 유배였다. 그동안 정철의 비호를 받았던 송구봉 형제에게 정철의 유배는 보호막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동인들이 장악한 조정에서는 또다시 반노叛奴 형제를 추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이도 벌써 환갑을 바라보는 58세. 이 나이에 잡혀서 고문을 받거나 감옥살이를 하면 죽을 수 있었다. 고심 끝에 자수하였고, 송구봉은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동생 송한필은 강원도 이성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을 북변 유배지에서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에 회한이 밀려들었다. 절친한 친구 정철이 같은 평안도 경내에 유배와 있어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또 워낙 낙천적인 성격도 유배를 견디게 해 주었고, 조선 도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희천에 유배를 왔기에 이 기회에 정암 조광조를 생각하며 도학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임진왜란의 발발 그러나 인생사가 어디 뜻대로 되던가. 1592년 임진년. 미증유의 대전란이 남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다. 민족적 비극과 대혼란의 이 7년 전쟁은 송구봉에게 지인들의 죽음을 연이어 알려 주었다. 최초의 충격은 문과 장원급제 출신이면서 무략이 뛰어났던 김여물이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과 함께 전사했다는 것.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애도시를 한 수 읊었다. 하지만 전쟁은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파죽지세로 북진한 왜군들에게 6월 중순 평양성이 함락되고, 유배 중이던 송구봉은 인근 명문산으로 은신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 후 9월에는 우직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조헌이 금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연이은 충격 속에서 마침내 1593년 9월 유배에서 풀려났다.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의 간청 끝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송구봉은 한성으로 돌아가기 전 양현사兩賢祠를 참배했다. 이곳은 희천 지역으로 유배 왔던 한훤당 김굉필과 그에게 도학을 배운 정암 조광조를 기리는 사당이었다. 제자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주도적으로 세운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찾은 셈이다. 이후 서둘러 남쪽으로 향하면서 전란의 참상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번번이 겹쳐 온다고 했던가. 황해도 인근으로 내려와 있던 송구봉은 자신을 스승의 예로 대해주고 진정을 다해 헌신적으로 모든 것을 준 평생지기 송강 정철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된다. 이어 이산해의 사촌동생이면서 변함없이 자신을 따라주었던 이산보가 56세 나이로 과로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일곱 살 많은 둘째 형 부필이 세상을 떠났고, 80을 바라보는 큰형 인필은 지방을 떠돌고 있다는 소식만 듣게 되었다. 가까웠던 친구도 형제도 동지도 모두 떠나가는 것을 보며, 송구봉은 “과연 내 인생은 무엇이었는가?”라는 탄식과 함께 눈물짓는 일이 많아졌다.
임종 전란이 한풀 꺾인 1596년 충청도 당진군 마양촌馬羊村(지금의 송산면 매곡리 수머굴. 숨은골이라고도 함) 농막에 송구봉 부부는 아들 취대就大 부부와 함께 짐을 풀었다. 제자 김장생도 아들 김집金集(1574~1656), 김반金般(1580~1640)을 데리고 와 짐 푸는 것을 도왔다. 김집과 김반도 어려서부터 송구봉에게 학문을 익힌 제자들이었다. 농막의 주인은 김반과 친분이 깊은 첨추僉樞 김진려金進礪였다. 겨우 안식을 찾는가 싶었지만, 송구봉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스러져가고 있었다.
1598년 무술년 평생의 반려였던 부인 창녕 성씨가 5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송구봉보다 아홉 살 아래로 간난艱難과 신산辛酸의 삶을 묵묵히 따라준 부인이었기에, 그것은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을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또 다른 평생지기 성혼이 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송구봉은 가끔 이이나 성혼과 주고 받았던 편지를 꺼내 만지작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결국 그 이듬해인 1599년 기해년(선조 32년) 8월 8일 아침. 아들 취대와 수제자 김장생을 비롯한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송구봉은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문인들과 인근 유림들은 당진현唐津縣 북면北面 원당동元堂洞에 장사를 지냈다.
조선을 지배한 그의 후예들
송구봉이 충청도 당진 숨은골에서 66세의 일기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지 24년 후인 1623년 광해군 15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이 반정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송익필이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흔적도 없었을 것이다. 인조 원년 윤 10월에 논공행상을 거쳐 52명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 책봉되었는데, 이들은 이후 300년간 조선의 정치사에서 원류를 형성하는 인물들이다. 그중 1등 공신 9명 모두 직간접적으로 송구봉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일은 송구봉의 영향이 조선 후기 사회에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
구봉의 직접 제자인 김류(1571~1648: 본관이 순천으로 세종 때 명신 김종서의 본관도 순천이다. 순천 김씨는 궁예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막료로 함께 전사한 김여물의 아들이었다. 평소 김여물과 가깝게 지내던 송구봉은 특히 애정을 가지고 김류를 지도하였고 김류는 스승을 잊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그날 구봉 선생님으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다.” 이귀는 송구봉, 성혼, 이이에게서 두루 학문을 배운 서인의 신진 엘리트였으나, 서인이 힘을 잃음에 따라 한직만 돌다가 인조반정 때는 평사부사로 있었다. 당시 65세였다.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아들인 신경진(1575~1643)과 훗날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로 청과 화친을 추진했던 지천 최명길(1586~1647: 본관 전주),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큰 외삼촌으로 반정 당시 군사력을 담당했던 구굉(1577~1642), 이서(1580~1637) 등은 송구봉의 수제자인 사계 김장생의 제자로 송구봉의 손자 제자에 해당한다. 송구봉과 뜻을 함께했던 성혼의 제자 김자점(1588~1652: 본관은 안동. 고려의 명장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이며, 단종 복위 당시 거사를 누설한 좌의정 쌍곡 김질의 5대손이며 백범 김구의 방조傍祖)은 조카 제자에 해당한다. 송구봉의 절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정철의 제자 권필의 제자인 심기원(1587~1644: 병자호란 후 역모 사건으로 능지처참됨)도 손자제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심명세(1587~1632)는 송구봉의 동지였고 형제처럼 지내던 심의겸의 손자로 송구봉에게는 제자와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인조반정 후 76세였던 김장생에게 사헌부 장령(정4품)이 제수된다. 이는 실직實職이라기보다는 명예직과도 같은 것인데, 새로운 왕이 초야의 학자를 고위직에 임명하고 정치의 개요와 학문하는 요령을 자문했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임은 분명하다. 송구봉의 성리학, 예학, 그리고 직直사상은 수제자 김장생, 김집 부자를 거쳐 다시 고스란히 우암 송시열에게 전수되었다. 스승인 송구봉이 이루지 못한 꿈을 그의 제자들이 하나씩 이뤄가게 된 것이다.
송시열은 송구봉의 묘갈명을 직접 지었다. 훗날 1689년(숙종 15년) 사약을 받고 죽을 때, 송시열은 제자 권상하(1641~1721)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이치와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이치는 곧음[直]일 뿐이다.” 송시열의 사상은 송구봉의 직直사상이었다. 제자와 후학들은 스승의 삶을 안타까워하며 누대에 걸쳐 송구봉을 위한 신원운동을 벌였다. 사후 여러 번의 신원 상소가 올려졌으나 모두 묵살당했고, 인조반정 후 1625년(인조 3년) 김장생 등의 제자들이 상소하여 스승의 양민 환원을 요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김장생이 송익필의 복권 상소를 계속 올려 결국에는 복권시켰다.
1752년(영조 28년) 충청도관찰사 홍계희의 상소로 송구봉은 통덕랑通德郞 행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었다. 사후에나마 신원이 이루어지고 관직의 길에 나아간 것이다. 후에 충청도 당진군 원당에 그의 사당인 입한재立限齋가 세워졌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영조 38년에는 김장생의 6대손에 의해 그의 저서 《구봉집》이 발간되었고, 족보에서 누락되어 빠져 있던 그의 이름도 사후 3백여 년이 지난 1905년 광무 9년에 족보에 등재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융희 4년인 1910년 7월 20일에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하고 26일에는 문경文敬의 시호가 내려졌다. 국권이 피탈되기 33일 전이다. (이때 융희제는 이미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사건으로 대한제국 주재 일본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게 실권이 박탈되어 있던 상태였다)
만약 송구봉이 부친의 악업의 영향을 받지 않고 떳떳하게 활동하였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제님 말씀처럼 임진왜란의 참혹한 전란이 8개월 만에 끝나고 전혀 다른 조선의 역사가 펼쳐졌을까? 오늘날에 와서야 그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
吾年六十一(오년육십일) 日覺俗緣空(일각속연공)
내 나이 예순 하나 세속 인연 비어감을 날로 느끼네
有壽仙何學(유수선하학) 無愁酒不功(무수주불공)
오래 사니 신선을 어찌 배울쏜가 근심이 없으니 술도 쓸모가 없구나
養多心轉靜(양다심전정) 看久理逾通(간구리유통)
함양이 깊어지니 더욱 마음 고요해지고 오래 보니 사물 이치 한층 잘 통하네
未路相知少(미로상지소) 迢然出世翁(초연출세옹)
늘그막에 서로 아는 사람 적으니 초연히 속세 떠난 늙은이로다
송구봉의 시, 오년吾年(내 나이)
도전 속 인물 개요
[도전 4편 7장] *모든 법을 합하여 쓰심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默)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끌렀으리라.’ 하니 이는 선도와 불도와 유도의 법술(法術)이 서로 다름을 이름이라.
옛적에는 판이 작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느니라.
태상종도사님 어록
그리고 또 미운 사람이 있으면 그놈은 역적모의한 놈이라고 매도를 한다. 해서 “역적모의를 했으면 근거가 있어야 할 거 아니냐?”하고 추궁을 하면 “아, 내게 그 사람들 모인 문서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다시 “그 문서를 가져와 봐라.” 할 것 아닌가. 헌데 사실이 아니니 그런 문서가 있을 수 있나? 그럴 땐 어떻게 하느냐? 사람이 죽어서 돌 지나면 소상(小祥)이라 하고, 2년이 지나면 대상(大祥)이라고 해서 큰 제사를 지낸다. 이 대상 소상 때에는 많은 조객(弔客)들이 온다. 그 집 문벌에 따라 3백명도 오고, 4백명, 5백명 오는 집도 있다. 조객이 오면 조객록을 써서 보관해 두는데, 그걸 몰래 훔쳐다가 겉장만 떼어내 버리고 이게 역적모의할 때 모인 놈들이라고, 그 증거라고 갖다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몰살을 시켜버린다. 역적 소리가 나오면 용서할래야 할 수가 없다. 반역행위를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매듭을 짓고 만다. 얼마나 혹독하게 하느냐 하면, 아들은 다 죽여 버리고 그 아낙네들은 다른 양반 집 종으로 보내버린다. 만일 배 속에 든 애가 있으면 잘 감시했다가 아들을 낳으면 잡아다가 그놈도 죽여 버린다. 씨를 말려야 후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못돼먹었었다. 그게 우리나라의 산 역사다. (『새 시대 새 진리 4권』 40쪽~41쪽)
조선붕당사의 뿌리, 동서 분당
조선사에서 붕당의 역사는 토지제도와 함께 국사 분야에서는 수학의 미적분에 해당할 정도로 난해한 부분이다. 정치적, 학맥적인 요소들이 함께 얽혀 있고,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분열성, 당파성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된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붕당사는 현재 우리 사회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있어 이해하는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조선 붕당의 뿌리에 해당하는 동서 분당 과정을 살펴 이해를 돕고자 한다. (이 부분은 조선 붕당사 연구에 탁월한 이성무 씨의 저서에 많은 도움을 얻었다)
사림士林의 개념 조선시대 정치사는 대개 ‘사대부 정치기-훈신 정치기-사림 정치기-탕평 정치기-외척세도 정치기’로 구분된다. 이 중 사림 정치기는 동서 분당이 시작된 선조시대이다.
사림士林이라는 말은 15세기 후반부터 역사적인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원래 사림은 사대부의 무리를 지칭하는 용어로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문관과 무관을 통틀어 사대부라고 했다. 그래서 사림이라고 하면 문무양반관료와 그 일족, 벼슬하지 않은 선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세조의 쿠데타 이후 성종 때까지 250명의 공신이 양산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한 훈구勳舊파가 정권을 차지하게 되고, 여기서 소외된 부류를 ‘사림士林파’라고 하게 되었다.
세조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집현전 학사 대신 재야에 있던 김종직 등의 젊고 야심 있는 신진 사류를 불러들였다. 이후 예종과 성종은 왕권을 위협하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류를 등용하였다. 사림은 훈구 세력을 누르려는 임금의 도움으로 잇달아 정계에 진출, 새로운 기풍을 불러 일으켰고, 추천제를 시행해 신진 사류의 정계 진출을 좀 더 쉽게 하였으며 인사권과 언론권을 차지하였다. 이에 이를 견제한 훈구세력에 의해 몇 차례의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이른바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였다.
사화는 훈구파나 외척에 의해 일어났고, 화를 입은 쪽은 거의 사림 세력이었다. 하지만 사림은 꿋꿋하게 살아남아 끊임없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53년 명종이 20세가 되어 모후인 문정왕후의 수렴첨정이 끝나고 명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외삼촌 윤원형에 의해 저질러진 정치적 폐단은 없어지지 않아 명종은 왕비 인순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강의 처남 이양을 중용했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양은 명종의 신임을 얻자 새로운 파벌을 만들었고, 그에게 순종하지 않은 사림들을 추방하면서 새로운 사화를 일으킬 흉계를 꾸몄다. 하지만 인순왕후의 동생인 심의겸이 계획을 미리 알아차리고 그를 제거함으로써 사림을 위기 직전에 구하게 되었다. 심의겸 역시 척신이기는 했으나 사림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특히 율곡 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과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심의겸의 조부 심연원沈連源은 김안국의 문인으로 친사림적인 인물이었다. 훗날 이준경, 홍섬 등 선배 사림으로 불리는 이들은 이때 심의겸의 도움으로 관계에 진출하였다.
선조 즉위 후 사림은 대거 정계에 진출했다. 명종이 부를 때는 좀처럼 상경하지 않던 퇴계 이황은 선조의 부름에는 응해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로 임명되었고, 을사사화 당시 파직되었던 백인걸은 71세의 고령임에도 교리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반면 권신들은 정치적으로 참패했다. 사림 세력의 승리는 기묘사화와 관련된 인물 중 조광조의 추증과 남곤의 관작 삭탈에서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훈구 세력과 권신이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자 사림은 더 이상 적대 세력이 없었다. 그러자 이들은 스스로 분열해 붕당朋黨을 이루었다.
사림파의 붕당화 초기 사림의 붕당 모습은 명종 때 심의겸의 도움으로 관계에 진출했던 선배 사림(이들은 당연히 심의겸에 우호적이다)과 후에 새롭게 정계에 진출한 후배 사림 사이의 당쟁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노당과 소당의 대립이었다. 이 노당에는 중종에서 명종까지 세 임금을 모신 고명대신과 선조 즉위에 큰 역할을 한 이준경, 심통원, 홍섬, 송순, 김개 등이었고, 소당 즉 사림은 이황, 노수신, 유희춘, 이이, 정철, 기대승, 심의겸, 류성룡, 오건, 김우옹 등이었다. 후배 사림은 선배 사림을 속물이라며 소인으로 몰아세우고 자신들은 군자임을 자처하였다. 이런 가운데 양자 간의 대립은 점차 심화되어 동서 분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권력이 제왕에게 집중된 왕조시대에 붕당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조선은 경국대전 외에도 『대명률大明律』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여기에는 붕당을 금지하는 조항이 명문화되어 있었고 그 벌은 죽음이었다. 조광조가 죽은 표면적인 이유도 붕당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선조 초기 명신인 이준경은 이 붕당을 예견하는 유차(遺箚: 죽음 직전 유서를 대신하는 상소문)를 올렸다. 노련한 정치가였던 이준경은 신진 사류의 개혁 지향적, 급진성, 비판적인 성향에 대해 불만과 우려를 동시에 느꼈고 그들 사이 특정 세력을 중심으로 붕당이 결성되는 조짐을 감지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율곡 이이는 시기와 질투, 음해의 표본으로 간주해 버렸다. 그러나 이준경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사림은 분열을 일으켰고, 그 분열의 핵에는 심의겸이 있었다. 이후 300년간 이어간 뿌리 깊은 당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열 선조 8년(1575)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면서 본격적인 붕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분열의 기폭제는 심의겸과 김효원의 알력이었다. 김효원은 이황, 조식, 김근공의 문인으로 1565년 명종 20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수재였다. 1572년 2월 이조전랑 오건이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다. 전랑은 문무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와 병조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의 통칭이다. 품계는 낮지만 유수한 청요직淸要職(주로 언론과 간쟁을 담당한 삼사三司,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원으로 신분적 배경과 함께 과거 급제라는 학문실력이 함께 입증된 출세가 보장된 자리, 특히 홍문관 교리 한번 지내는 게 영의정 두 번 지내는 것보다 더 자랑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중에서도 으뜸가는 직책이었다.
문관을 중시했던 조선에서는 이조전랑의 중요성은 매우 컸다. 이조전랑은 문관의 인사에서 정승과 판서를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당상관도 이조전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조전랑은 언론 삼사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청요직을 선발하고 재야인사의 추천권을 가지는 특권과 자신의 후임을 지명하는 이른바 ‘자대권自代權’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관직 체계에서 이조전랑에게 이런 특권을 준 것은 대신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이조전랑은 인사권과 언론권을 모두 갖게 되는 직책이기 때문에 누가 이 전랑직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결정될 수 있었다.
이런 자리에 김효원을 임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심의겸의 눈에는 출세와 영달을 위해 윤원형의 집을 출입한 천박한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물론 이는 사실은 아니지만 한번 박힌 편견은 잘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 그 자리는 심의겸과 가까운 조정기가 차지했다. 이후에도 김효원은 심의겸의 방해로 전랑의 문턱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한편 김효원의 눈에는 심의겸은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어야 할 척신이며, 노회한 구신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이조전랑에 오른 김효원은 심의겸을 두고 “미련하고 거칠어서 중용할 수 없다”고 하는가 하면 “기질이 조잡하고 어리석어서 이조에 쓰는 것이 불가하다”고 비난하면서 양측의 반목은 심화되었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김효원의 후임으로 거론되었다. 심충겸은 외척이긴 하지만, 문과에 장원급제한 인재였다. 그러나 김효원은 “전랑이 외척 집안의 물건도 아니고 반드시 심씨 문중에서 차지해야 한단 말인가?”라며 반대하였다. 이에 김효원과 심의겸을 표면에 내세운 신진사류와 구세력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에 조정책調停策을 내세운 이가 바로 율곡 이이였다. 일찍이 이준경의 유언을 음해와 저주의 표본으로 간주하였는데, 이제 와 그 분열이 가시화되고 있기에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이에 조정책을 제시했으나 도리어 분쟁을 격화시켜 ‘동서 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낙산 건청동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하였고, 심의겸의 집은 도성 서쪽 정릉동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계열을 서인西人이라 했다. 동인은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명목상 허엽을 영수로 내세운 영남계열의 소장파 인사들이었다. 서인은 허엽과 대립하던 박순을 영수로 결집하여 이이와 성혼, 정철, 조헌, 윤두수, 윤근수, 이산보 그리고 구봉 송익필 등이었다.
사색당파四色黨派의 형성 후에 이들은 상대 당에 대한 강경책과 온건책 등으로 분열하면서,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여 이른바 사색당파가 형성되었다.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그 씨가 말랐고, 인조반정 후에는 서인과 남인의 연립정부가 이후에는 노론 우위 속에 소론과 남인으로 이루어지다 탕평책이 실시되는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노론 우위에서 벽파와 시파로 헤쳐모여 하게 되었다.
이후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기에는 노론 일당 전제에서 한 가문에 의해 정국이 좌지우지되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결국 노론이 집권한 가운데 나라는 망했고, 소론(대표적으로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우당 이회영 일가)과 남인 가문(대표적으로 안동의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가, 대전지역의 고령신씨 집안인 예관 신규식, 단재 신채호 등)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가상 인터뷰] 구봉 송익필을 만나다
(이번 호 도전인물열전에서는 기사의 주인공 구봉 송익필 선생을 만나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보는 가상 인터뷰 코너를 마련했다. 본 인터뷰 문답을 통해 시대를 초월하여 한 인물에 대해 널리 조감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안녕하십니까? 구봉 선생님. 이번 인물열전의 주인공으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
- 네, 반갑습니다. 이렇게 얘기할 자리가 마련되어 기쁘기도 하면서 설레는 마음이 큽니다. 제 이름이 도전 속 증산상제님 말씀에 언급되었는데, 그 이후로 저에 대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고 해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선 신상과 가계家系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아시다시피 제 이름은 송익필宋翼弼이고 자字는 운장雲長, 호號는 주로 거주하던 파주 교하交河에 있는 구봉산龜峰山(지금의 심학산尋鶴山으로 194m이다. 심악산深岳山이라고도 하며, 전체적인 모습이 거북 또는 도롱뇽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큰 양수리 쪽으로 물을 찾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을 따서 구봉龜峰 또는 현승玄繩이라 지었습니다. 중종대왕 29년 갑오년(1534년) 2월 10일 한양의 진장방鎭將坊 삼청동 근처에서 태어나(지금의 청와대 근처) 선조대왕 32(1599) 기해년에 충청도 당진 면천 마양촌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10대조인 송송례宋松禮는 고려 원종 때 상장군, 추밀원부사, 첨의중찬을 지낸 명문화벌로, 원나라의 고려 침공 당시 무신집권 세력인 임유무를 제거하고 고려 왕권을 안정시킨 공으로 정렬공貞烈公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크게 현달하지 못하고 고조부인 송근, 증조부인 송소철을 지나서 조부인 송린宋璘이 잡직인 부장 벼슬을 지냈지요. 황해도 배천에서 살았다가 부친인 송사련 때에 고양으로 이주하여 세거지가 비로소 고양의 구봉산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정민공 안당의 서매庶妹인 안감정安甘丁이고 부친은 송사련(宋祀連, 1496~1575), 어머니는 연일 정씨延日鄭氏이십니다. 형제는 큰형 인필과 둘째 형 부필富弼이 있고, 동생인 운곡거사雲谷居士 한필翰弼과 여동생 한 명이 있습니다. 여동생은 종실인 한산수漢山守와 결혼하였고, 저는 명문가인 창녕 성씨(1543년~1598년)와 혼인하여 큰아들 취방就方을 낳았습니다. 측실인 수원 최씨에게서는 내 임종을 지켜준 취대就大, 취실就實과 딸이 한 명 있고, 본관은 여산礪山입니다.
어릴 적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이미 어렸을 때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다고 하던데요.
- 저는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신분 문제도 없었고, 사대부들과 교류하였지요. 기억력이 비상한 편이었고, 스승은 별도로 두지 않고 성리학을 공부했는데 학문연구를 게을리하진 않았습니다. 아마 7세 때인 1540년 경자년인가에 ‘산가모옥월참차山家茅屋月參差아’(산비탈 조촐한 띳집 지붕에 달빛이 어린다)라는 시구를 쓴 적이 있어요. 숙헌叔獻(율곡 이이의 자로, 서인들은 호가 아닌 자를 불러 서로간의 높낮이를 없애버리는 규범이 있는데 그 시초가 송구봉이다)이 8세 때 화석정 시를 썼다고 하는데 내가 좀 빨랐지요(웃음). 훗날 이산해, 최경창, 백광훈, 최립, 이순인, 윤탁연, 하응림과 함께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불렸고, 매월당 김시습(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생육신의 한사람, 금오신화의 저자), 추강 남효원(육신전六臣傳 등을 지어 사육신의 충절을 드높인 생육신의 한 사람)과 함께 시詩의 산림 3걸로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에 대해서는 용모와 풍채가 훌륭하고 목소리도 좋았다는 평이 있습니다. 글씨도 당대 명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건 세인들의 평으로, 과찬이라 생각합니다. 절친한 친구인 숙헌과 호원浩原(우계 성혼의 자) 사이에 왕래한 편지를 묶은 책으로 [삼현수간三賢手簡](보물 1415호 호암박물관 소장)이 있는데, 성리학 이론들이 집대성되어 있고 친필들인데다 다들 명필이라 서예사적으로도 가치가 있을 걸로 봅니다. 거기에는 제가 쓴 초서草書도 있는데, 한 글자 흐트러짐 없이 정연한 초서교본을 대하는 거 같다는 과분한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동인이던 홍가신은 개인적으로 저와 친분이 있어 늘 따르고 존경하였는데, 홍가신의 동생 홍경신은 형이 미거한 신분인 저와 친교를 맺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지요. 하루는 홍경신이 “형님께서는 어째서 송익필과 친하게 지내십니까? 반드시 송가 녀석을 만나면 모욕을 주겠습니다” 라고 하자, 홍가신은 껄껄 웃으며 “과연 네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결코 못할 것이다” 라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마침내 어느 날 제가 홍가신의 집을 방문했는데, 잔뜩 벼르고 있던 홍경신은 저를 마주하자마자 저의 안광이 벼락치듯 하고 선풍도골의 풍채가 위압적인지라 자기도 모르게 마당에 내려가 주저앉고 맞으며 말하기를 “내가 절한 것이 아니라 무릎이 스스로 굽혀진 것입니다”라고 둘러대는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지모가 깊어서 남들이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꾀를 내어 사람들의 탄복을 자아내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토정 이지함(1517~1578)을 통해서 교유하던 고청 서기(徐記: 1523~1591)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들, 제갈 공명이 어떻게 생겼는가 알고자 하면 마땅히 송구봉을 볼지니라. 구봉은 단지 제갈 공명을 닮은 것이 아니라 제갈 공명이 그와 흡사하니라”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모가 풍부하면 좋을 거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요. 미워하는 측에서 보자면 오히려 경계해야 할 요소이기 때문이지요. 친구들과 관행화된 호칭을 거부하고 자字를 부르면서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을 들어 주기도 했고, 성격상 나라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적극적으로 논의를 펼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숙헌이나 호원이 귀담아 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계함季涵(송강 정철의 자)이야 말할 나위 없었구요. 그래서 동인은 나를 ‘서인의 모주謀主’라고 공격하기도 했지요.
제 성품은 강건하지만 몸은 약한 편이었습니다. 46세가 되었을 때는 왼쪽 팔이 뻣뻣해지는 증세로 고생을 하기도 했고 자식을 앞서 보내는 아픔도 겪었습니다.(1579년)
율곡 이이 선생과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과는 막역한 관계라고 알고 있는데요.
-서로 사는 지역도 비슷하고(현재 파주시 경계 안에 있는데, 율곡은 강릉 외가 오죽헌에서 태어났고, 본가인 이곳에서 살았다. 임진강 인근으로 현 파주에서는 동북방향이고, 송구봉이 살던 심학산은 서남방향에 있다. 우계 성혼이 살던 지역은 그 중간지역이다), 나이도 비슷해서(이이는 1536년 병신생, 성혼은 1535년 을미생) 아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서로의 비판과 충고, 격려와 존경을 통해 형성된 우리의 우정은 후대의 귀감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하였던 맹자가 말한 불협장不挾長, 불협귀不挾貴(나이 많고 적음과 지위의 귀하고 낮음과 형제 많고 적음 등을 따지지 않고 친구를 사귄다는 맹자 만장장구의 말)의 교우관계라 할 수 있겠지요. 죽어서도 변함이 없는 신교神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함(정철)도 숙헌(이이)과 같은 병신생으로 만나면 마음이 너무 편안합니다. 숙헌과는 학문적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지만 계함은 학문적으로는 맞서려 하지 않고 스승의 예로 대해 주었습니다. 물론 둘 다 호불호가 분명한 병통은 있지만 그래도 정승감은 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 많고 살갑고 속 깊게 대해주고, 술 좋아하고. 출사를 못한 나로서는 숙헌과 계함을 통해 정치적인 포부를 그런대로 풀 수 있었지요.
제자를 두기엔 조금 이른 27세 때 사계 김장생을 첫 제자로 하여 제자 양성에 힘을 쓰셨는데 그 과정과 교육방식의 특징이 있다면?
- 25세 때 숙헌과 아우 한필과 별시에 응시하여 합격했습니다. 장원은 당연히 숙헌이었구요. 하지만 시험과제인 ‘천도책天道策’의 해답에 대하여 숙헌이 저를 추천하여 제가 이를 잘 설명해 주면서 선비들 사이에서 문장과 학식이 알려졌는데, 이때 사관이었던 이해수에 의해 과거 금지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파주 구봉산 자락 초당에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구봉선생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숙헌을 통해 알고 지내던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1526~1582)가 13세 된 아들 김장생金長生(1548~1631)을 맡아 달라고 했어요. 산림에서 최초의 사제관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제관계라고 하지만 한 자 한 자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읽을 책을 정해주고 수시로 들러 질문을 던져 주었지요. 처음부터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을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어 사색을 중요시하고 연구자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선생에게만 의지하는 주입식 교육은 자칫하면 창의성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대로 희원希元(사계 김장생의 자: 스승은 제자의 이름을 부르는 법인데, 자를 불러주면서 동학同學의 반열로 높여 대우해 준다는 의미)이 잘해 주었어요. 그 뒤를 이어 김집 金集(신독재愼獨齋, 1574~1656, 사계 김장생의 아들로 부자가 함께 송구봉에게 학문을 배웠음), 송준길宋浚吉(동춘당同春堂: 1606~1672), 송시열宋時烈(우암尤庵: 1607~1689), 이유태李惟泰(초려草廬: 1607~1684) 등으로 맥이 이어져 기호예학파를 배출하였습니다. 덕분에 제가 조선 예학의 선구자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어요.
부친의 악업(신사무고辛巳誣告와 신분적인 한계)으로 평생의 멍에를 짊어지게 되었는데 아버지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신지.
- [논어] 자로 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당黨에 곧게 행동한 자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집에 들어온 남의 양을 가로채자 아들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실토하였습니다.”
이에 공자는 답하였다. “우리 당의 곧은 자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하여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주니 곧음은 그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葉公 語孔子曰 吾黨 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 孔子曰 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이 구절을 보면서 저는 그 울림이 남달랐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악업으로 내 처지가 불우하게 되었어도 내 스스로 곧음(直)을 지킴으로써 한 점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갈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핵심되는 사상은 어떤 것인지 간략히 설명해 주신다면?
- 위에서도 언급한 직直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 본성인 선善을 회복하는 실천 방법으로 예절 외에 거짓됨이 없는 바른 행동, 직直에 대한 공부를 강조했습니다. 직을 정正 또는 선善이라 해도 좋고, 인仁이라 해도 되며, 성誠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이는 직이라는 글자의 뜻에 함축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평생 동안 직直을 생활철학으로 삼음으로써 내적으로는 직심直心, 직언直言, 외적으로는 직행直行을 발현하는 것입니다. 이 직사상이 생활철학으로 이어져서 예학으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논어]를 특히 좋아했는데 그 중 극기복례克己復禮, 즉 자아의 사사로움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예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구절이 크게 와 닿았습니다. 또한 [논어] 옹야 편에 나오는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 즉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곧음(直)’이라는 말도 크게 다가왔어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데다가 내 성정과도 들어맞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희원希元의 장남 김은金檃의 자를 직백直伯이라 지어주었습니다.
또한 제가 생각할 때 리理는 임금, 기氣는 신하입니다. 그래서 이황과 기대승의 주리와 주기에 대한 논쟁의 정치적 의미는 어느 쪽을 중시할 것이냐 인데, 저는 군신공치君臣共治, 더 나아가 신하가 임금을 일깨워 정치를 하는 길을 열어주는 단서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상들이 제자들을 통해서 내려간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禮사상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해주시죠.
- 유학의 본래 목적은 예를 통한 인의仁義의 실천을 근거로 하는 것이고 예란 본래 리理의 실현으로 인간의 당위성이며 자연질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란 곧 리를 뜻합니다. 우리 예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예의 근본정신에 충실하고자 하였습니다. 상례와 제례는 슬퍼함이 근본인 것이지 형식적인 것은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살아있을 때의 예법대로 효의 지극한 도리를 실천함이 본래의 참뜻이라는 것이지요.
둘째는 예의 시의성時宜性을 추구하였습니다. 예란 것이 고금이 다르고 그 형세가 다르기 때문에 마땅하게 처리해야지 문자에 구애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근본 정신은 변함없으나, 그 형식과 방법은 장소와 때, 상황에 맞아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예의 바탕은 의義이며 의에 맞아야 진정한 예가 되고, 비로소 예적禮的 중용이 구현되는 셈이지요. 이른바 시중지도입니다. 좀 더 자세한 사항은 제가 만년에 주자의 [가례]를 해석하고 설명한 [가례주설家禮註設]을 참조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계시다면.
- 상제님 말씀 속에 제 이름 석 자가 언급되어 이렇게 재조명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송구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스스로를 돌이켜보자면, 비록 남보다 뛰어난 자질과 재주, 학문적인 성취는 있었지만, 신분적인 제약과 내우외환의 혼란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를 제대로 발휘해보지 못한 제 삶이 참 불우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도 낙천적인 성품을 지녔기에 잘 견디었고, 학문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유학자 본연의 도리를 올곧게 실천하며 의리와 절조를 굽히거나 물러서지 않은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고 자부합니다. 이런 점을 제자들에게도 잘 전수한 것 같습니다.
구봉산을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흐르듯 우리 서인과 동인들이 품은 뜻은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안정케 하는 경세가로서의 뜻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젠 대립과 질시보다는 상생의 대도세계로, 상제님의 조화선경으로 가는 데 다 같이 한 마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할 말은 많지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시로서 매듭을 지을까 합니다.
족함과 부족함 [족부족]
군자는 어찌 길이 스스로 만족하고, 君子如何長自足(군자여야잠자족)
소인은 어찌하여 길이 부족해 하나? 小人如何長不足(소인여하장부족)
부족해도 족足해 하면 항상 여유가 있으나, 不足之足每有餘(부족지족매유여)
족한데도 부족해 하면 늘 부족하다네. 足而不足常不足(족이부족상부족)
즐거움이 남음이 있으면 부족함이 없게 되나. 樂在有餘無不足(락재유여무부족)
부족함을 걱정하면 언제나 족하리오? 憂在不足時足(우재부족시족)
安時處順(안시처순)(주3) 하면 다시 무슨 걱정이랴만, 安時處順更何憂(안시처순경하우)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면 부족함을 슬퍼하리. 怨天尤人悲不足(원천우인비부족)
내게 있는 것을 구하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나, 求在我者無不足(구재아자무부족)
밖에 있는 것을 구하니 어떻게 족하리오? 求在外者何能足(구재외자하능족)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대원출판, 2003)
『증산도의 진리』(안경전, 상생출판, 2014)
『구봉 송익필』(이종호, 일지사, 1999)
『조선의 숨은 왕』(이한우, 해냄, 2011)
『구봉 송익필의 도학사상』(김창경, 책미래, 2014)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이덕일, 김영사, 2001)
『조선왕조실록 3 중종-광해군』(이성무, 살림, 2015)
주1. 송구봉 신분에 관한 송사의 쟁점은 송구봉의 외증조모인 중금과 조모인 감정의 속량贖良 사실 여부에 있었다. 중요한 점은 송구봉의 조부인 송린이 잡직이나마 양민으로 종사할 수 있는 직장直長과 관상감 판관을 지냈고, 송사련 역시 양역良役을 지냈으니 속량이 되었다 할 수 있다. 당시 중종 대에 만들어진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형전에 의하면 2대 양역을 지내고 60여 년 기한이 지나면 천민에서 벗어나 양민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2. 송구봉과 정여립의 난 그리고 기축옥사에 관련한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1584년 갑신년 율곡 이이가 죽은 후, 서인은 동인에 계속해서 밀려 있었고, 이때 송구봉 일가에 대한 환천還賤 송사가 있었다. 법리적으로는 시효도 지난 말이 되지 않는 송사였지만 우위를 점한 정치적인 힘으로 밀어붙여 결국 송구봉 일가에게 더할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주었다. 이 사건 이후 송구봉은 정치적인 반격의 수를 모색했으리라. 여기에 스승으로 모셨던 율곡 이이를 배신한 정여립에 대한 서인들의 원한 어린 시각, 체제비판적이었던 정여립의 성향과 그 사조직이 지닌 결집력 등을 보았을 때 그의 역모 논의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보인다.
여기에 조선 최초로 방계 승통으로 보위에 오른 선조는 정통성 면에서 취약했다(선조의 부친은 중종의 막내아들인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岹이다. 선조는 왕자가 아닌 왕손으로 그것도 서손庶孫으로 왕위에 올랐다). 유교적 명분을 우선시하는 조선이 개국한 이후 최초의 사건. 우선 당사자인 선조 자신도 준비되지 않은 왕이었기에, 이런 사실을 느끼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신하들 역시 적통 국왕을 대할 때와 같은 위엄을 느끼지는 못한 것 같다. 이 부분은 선조가 아닌 다른 이가 왕이 되었어도 겪게 되는 어려움이었다. 이럴 때는 뛰어난 자질로 난관을 돌파하여 단단한 정통성의 기반을 만들어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쟁에 휘말려 왕위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실제 그런 사례는 아들 광해군 대에 일어났다.
스스로 정통성을 만들지도,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지도 않은 선조는 중간 그 어디쯤을 선택했는데 그게 동서분당의 당쟁이 시발하게 된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선조는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았고, 국량이 협착한 면이 있었기에 동서 붕당을 방조하여 그 중간 지점에서 실리를 챙겼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양 세력의 어느 한쪽도 일방적으로 커 가는 걸 용납하지는 않으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선조의 정치적인 계산(동인의 세력이 너무 커졌으니 이를 제어해야 한다)과 서인과 송구봉의 정치적인 반격 의도 등이 함께 어우러져 그 피해가 가중된 것으로 보인다. 역모 혐의를 받은 정여립은 제대로 조사도 받기 전에 죽었다(또는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서 또 다른 역모주동자가 나와야 하는데, 그래서 나온 게 길삼봉吉三峯이라는 가상인물이다. 바로 이 말을 만든 장본인으로 송구봉이 지목되었다. ‘길吉’은 당시 사람들이 도적떼 수령으로 여기던 홍길동의 길이고, ‘삼봉’은 국초부터 대역죄인의 우두머리로 간주되던 정도전의 호다. 특히 정도전은 고종 때 신원되기까지 그 언급조차 기피되던 인물이었다. 이 가상의 인물인 길삼봉을 찾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이이나 정철을 통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자신의 포부를 어느 정도는 간접적으로 실현해 보았던 송구봉의 행적으로 보았을 때,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에는 송구봉의 역할이 매우 컸으리라 생각한다.
주3. 안시처순安時處順- 삶은 기쁨이며 죽음은 슬픔이라지만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살아간다는 것으로, 때에 따라 순응하여 물 흐르듯이 살면 무슨 근심이 있겠느냐는 뜻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편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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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천주侍天主 시대를 연 동학東學 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0) | 2016.01.26 |
격랑 속의 초인, 대한남아의 기개를 떨친 안중근安重根 (0) | 2016.01.26 |
비운의 천재 용호대사 정북창 (0) | 2016.01.26 |
후천 지상선경 건설의 주벽 절대신앙의 화신 마테오 리치 대성사 (0) | 2015.11.23 |